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1971년 어느 봄날, 저는 한 소녀를 만났습니다.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 우리는, 참 그럴듯하게도, 정치적 권리와 시민권에 대한 수업을 함께 듣고 있었죠. 그녀는 풍성한 금발 머리와 커다란 안경, 화장 안 한 얼굴로 절 끌어당기는 힘과 침착함을 풍기고 있었어요. 수업이 끝나고 전 그녀를 따라 나가 절 소개하려고 했죠. 그녀의 등에 닿을 정도로 가까이 따라가긴 했는데, 그러진 못했어요. 어쩐지 전 이게 흔히 어깨 한 번 두드리는 일이 아니라, 멈출 수 없는 무언가를 시작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후 며칠간 그녀를 몇 번 더 보았지만, 여전히 그녀와 얘길 나눌 수가 없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밤, 전 법학 도서관에서 예일 로 저널(주. 법학 학술지)에 합류할 것을 권하는 한 학우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죠. 그는 그게 대형 사무소에서의 일자리나 연방법원 판사 밑에서의 실습직(Clerkship)을 보장한다고 얘기했죠. 사실 별 관심은 없었어요. 전 그냥 아칸소의 집에 가고 싶을 뿐이었거든요.


그리고 그녀를 다시 보았을 때, 그녀는 그 긴 방의 반대쪽 끝에 서 있었죠. 마침내 그녀도 나를 쳐다보았고, 난 그녀를 응시했죠. 그녀는 책을 덮어 내려놓고는 내게 걸어오기 시작했어요. 도서관 끝까지 걸어와서, 내게 이렇게 말했죠.


“야, 그렇게 계속 쳐다보고 있을 거면… 자, 이제 나도 너 쳐다봤으니까, 최소한 이름이라도 서로 알자. 난 힐러리 로댐이야. 넌?”


인상 깊고도 놀라웠어요. 믿지 않으실지도 모르겠지만, 전 순간적으로 말조차 하지 못했죠. 마침내, 저는 불쑥 제 이름을 말했고, 몇 마디를 주고받고는 그녀는 떠나버렸어요. 뭐, 저는 법학 리뷰에 가입하진 않았지만, 새로운 목표를 갖고 그 도서관을 떠나게 됐죠.


며칠이 지나고, 다시 그녀를 만났어요. 기억해요. 긴 흰색 꽃무늬 스커트를 입고 있었죠. 제가 그녀에게 다가가자, 그녀는 다음 학기 수업을 등록하러 간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저도 간다고 했죠. 아, 그땐 수강신청을 하려면 그래야 했거든요. 어쨌든 우린 줄을 서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어요. 전 꽤 잘했다고 생각했어요. 줄 맨 앞에서, 담당자가 절 보고 이렇게 말하기 전까진 말이죠.


“빌, 여기서 뭐 해요? 아침에 벌써 등록했잖아요?”


전 시뻘게졌고, 그녀는 크게 웃었죠. 그리고 뭐, 위장이 벗겨졌으니 그냥 밀고 나가자고 생각해서, 미술관까지 산책이나 하자고 그랬죠. 그 이후로 평생 쭉, 함께 걷고, 말하고, 웃고 지내고 있어요.


좋은 시간도 나쁜 시간도, 행복도 슬픔도 있었죠. 우린 이른 아침 우리의, 그리고 여러분의 좋은 친구 마크 와이너가 별세했다는 소식을 듣고 함께 울었어요.


우린 추억으로 평생을 쌓아갔죠. 첫 달의 첫 산책 후, 저는 일리노이 파크 릿지(주. 시카고 교외)에 있는 그녀의 집으로 운전해갔어요. 그녀의 가족들을 만나고, 그녀가 자라난 마을을 보기 위해서였죠.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중산층의 완벽한 표본과도 같았죠. 멋진 집이 들어선 길들, 좋은 학교, 훌륭한 공원, 큰 수영장, 그리고 대부분의 백인들.


전 그녀의 가족이 좋았어요. 퉁명스럽고 보수적인 아버지, 제멋대로인 형제들, 베어스와 컵스를 응원하는 게 왜 훌륭한지 상찬하는 가족들. 그리고 일리노이 분들을 위해 말씀드리는데, 그들은 “내년을 기다리라”는 말의 뜻을 내게 설명하기까지 했거든요. 내년엔 될 겁니다, 여러분. (주. 컵스는 108년간 월드시리즈 우승을 거머쥐지 못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달랐습니다. 장모님은 사내애들보다도 리버럴했죠. 그녀는 제 유년을 식은 죽 먹기처럼 보이게 만들 정도의 유년을 보냈어요. 부드러운 매너 때문에 과소평가하기 쉬웠지만, ‘표지만으로 책을 판단해선 안된다(사람은 겉만 봐선 모른다)’는 격언을 계속 상기시키는 사람이었죠. 그녀를 알게 된 건 힐러리가 준 가장 큰 선물 중 하나였어요.


전 힐러리가 그녀의 감리교 유년부 목사 돈 존스 씨를 통해 사회 정의에 관심을 갖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녀를 시카고 시내로 데려가 마틴 루터 킹의 연설을 듣게 해 주었고, 그의 일생동안 친구가 되어주었어요. 이건 아마 그가 유일하게 보지 못한 그녀의 캠페인이 될 겁니다.


그녀가 대학에 진학한 후, 시민권에 대한 지지와 베트남전 반대 등은 그녀가 정당을 바꾸어 민주당원이 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대학과 로스쿨 중간에, 홀로 자유로이 알래스카로 떠나 물고기를 손질하며 시간을 보냈죠. 더 중요한 건, 제가 그녀를 만났을 때, 그녀는 이미 로스쿨의 법률 서비스 프로젝트에 관여 중이었고, 매리언 라이트 에델먼(주: 미국의 아동 권리 운동가)의 영향을 받고 있었으며, 월터 먼데일 상원의원의 분과 위원회에서 이민자 캠프의 노동자들을 인터뷰하는 여름 인턴십까지 수행했다는 거였어요.


그녀는 거기에 예일 뉴헤이븐 병원에서 아동 학대가 의심되는 케이스를 다룰 과정을 개발하기 위해 일을 시작하고 있었어요. 그녀는 아동 문제에 깊이 관심을 갖고 있었고, 로스쿨에서도 아동 연구 센터에서 일하며 가난한 아이들의 삶과 미래를 진보시키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연구하기 위해 몇 년을 더 일했죠.


그녀는 이미 세상을 진보시킬 방법을 알아내리란 결심이 있었던 거죠. 힐러리는 개별 시민들의 공공에의 봉사라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눈을 열어주었습니다. 1972년 여름, 그녀는 알라바마의 도선 시로 떠났습니다. 당시 남부에서 오십만 명이 넘는 백인 학생들이 다니고 있던 인종 분리 학교(Segregated academy) 중 한 곳을 방문하기 위해서였죠. 그들은 경제적 타산을 맞출 유일한 방법이, 법적으로 허용되지 않은 연방세 면세 혜택을 받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녀는 그들이 자격이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 그곳으로 갔습니다. 그녀는 오직 홀로 그 학교 중 한 곳으로 걸어 들어가서, 갓 마을로 이사와 아들을 보낼 학교를 찾는 중인 주부인 척 연기를 했어요. 간단한 인사를 주고받은 뒤, 그녀는 이렇게 말했죠.


“결론적으로, 제가 아들을 이 학교에 입학시키면, 우리 아이가 인종 분리 학교에 다니게 된다는 거죠? 그렇죠?”


남자는 이렇게 말했죠.


“물론이죠!”


낚은 거죠. 전 그런 걸 수 천 번이나 봤어요.


그녀는 돌아왔고, 그 만남은 리포트 일부가 되었습니다. 메리언 라이트 에델먼이 필요로 했던, 닉슨 정부가 그 세제 혜택을 폐기하도록 압박하기 위한 정보를 제공했죠. 우리의 아이들은 평등하게 교육받을 권리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남부 텍사스로 내려가, 내가 만난 가장 멋진 남자 중 한 사람, 훌륭한 노조 지도자 프랭클린 가르시아를 만났습니다. 그녀가 멕시코계 미국인들을 유권자로 등록하는 것을 도와주었죠. 아마 그들 중 일부는 2016년에도 투표권을 갖고 그녀를 지지하지 않을까 싶군요.


로스쿨에서의 마지막 해, 힐러리는 이 일을 계속 이어갔습니다. 왜 그렇게 많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소년들, 그러니까 청소년들이, 수년씩 성인 교도소에 성인들과 함께 갇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사우스 캐롤라이나로 내려갔지요. 그녀는 그에 대한 보고서들을 정리하여, 몇 가지 변화를 이끌어냈습니다. 늘 무언가를 진보시켰지요.


그럼, 본론으로 돌아가도록 하죠. 전 그녀와 결혼하려 애를 쓰고 있었습니다. 영국 여행 중에 첫 프러포즈를 했습니다. 그녀의 첫 해외여행이었죠. 멋진 애너데일 호숫가에서 저는 그녀에게 결혼해달라고 말했어요. 그리고 그녀가 말했죠. 안돼.


1974년 저는 로스쿨 강의를 위해 집으로 떠났고, 힐러리는 아동 문제를 위해 계속 일하기 위해 매사추세츠로 떠났습니다. 이번엔 인구 조사상 왜 그토록 많은 아이가 학교에 다니지 않고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였어요. 그녀는 그들 중 한 명이 현관의 휠체어에 홀로 앉아있는 걸 발견했죠. 또 한 번 그녀는 이 아이들에 대해 보고서를 정리했습니다. 신체적, 비신체적으로 장애를 가진 아동도 공교육을 받을 권리를 똑같이 보장받도록 하는 법안을 의회가 채택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죠. 그 결과를 어젯밤에 보셨을 겁니다. 아나스타샤 소모자의 연설에서 말이죠. (주. 아나스타샤 소모자는 장애인으로, 전날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연설했다) 그녀는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결코 조롱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그들의 능력을 북돋워 주었죠.


그동안, 저는 여전히 그녀에게 결혼하자고 설득을 하고 있었죠.


두 번째로 저는 좀 다른 전략을 시도했습니다. 전 이렇게 말했죠. 난 정말 당신과 결혼하고 싶지만, 당신은 결코 그러지 않을 거라고. 그녀는 웃으며 날 바라봤어요. 얜 또 뭘 하는 거야? 하는 느낌으로요. 그녀는 그건 좋은 작업 멘트가 아니라고 말했죠. 저는 저도 알지만, 그게 사실이라고 말했어요. 정말 사실이었죠.


전 얘기했어요. 정치에 뛰어들고자 하는 젊은 민주당원들 대부분은 선의를 갖고 있고 웅변에 뛰어나지만, 당신처럼 사람들의 삶 속에서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실제로 행동하지는 않는다고요. 그래서 전 제안했죠. 일리노이의 집으로 돌아가든지, 아니면 뉴욕으로 가서 공직에 출마해보는 게 어떻겠느냐고요. 그녀는 그저 웃어 보이고는, 정신이 나갔느냐며, 나한테 투표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하더군요.


마침내 그녀는 아칸소로 날 찾아왔죠. 그때 로스쿨 사람들은 깊은 인상을 받고 강사 자리를 제안했어요. 그녀는 큰 기회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죠. 낯설고, 더 시골 같고, 그녀가 지낸 그 어디보다도 문화적으로 보수적인, 사람들이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그녀를 받아들일 수 있을지조차 잘 모를 곳으로 가는 거요.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죠. 그녀는 교직을 좋아했어요. 학생 중 한 사람이 “음, 뭘 기대하세요? 난 고작 아칸소 출신인걸요.” 라고 말했을 땐 화를 내며 말했어요.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당신은 그 누구만큼이나 영리해요. 당신은 다만 당신을 믿고 더 열심히 일하고, 높은 목표를 세워야 할 뿐이에요.” 라고요. 그녀는 누구나 할 수 있다고 믿었죠.


그녀는 북서부 아칸소 최초의 법률 지원 클리닉(Legal aid clinic)을 시작했어요. 돈을 지불할 능력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법률 지원을 제공하는 곳이었죠.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시카고로 돌아가려는 그녀를 공항에 데려다주고 있었는데, 가는 길에 작은 벽돌집 앞에 ‘팝니다’ 팻말이 붙어있는 걸 보게 되었죠. 그때 그녀가 말했어요. 저 집 예쁜데? 100제곱미터의 다락이 있고, 선풍기는 있지만 에어컨은 없는 이 더운 아칸소에서 말이죠, 방충망이 딸린 현관이 있는 집이었죠.


힐러리는 독특하게 디자인된 아름다운 집이라고 부언했어요. 전 그 큰 기회를 잡았죠. 집을 사 버렸어요. 매달 175달러의 모기지가 생겼죠.


그녀가 돌아왔을 때 전 그녀를 데려다주며 말했어요. 당신이 좋아했던 집 기억나? 그녀가 그렇다고 말했어요. 난 말했죠. 당신이 다녀오는 새 내가 그걸 사버렸어. 그러니 당신은 나랑 결혼해야 돼. 인생은 원래 삼세판이죠.


1975년 10월 11일, 우리는 그 작은 집에서 결혼했어요. 제 최고의 친구와 결혼했죠. 전 그녀와 함께한지 4년이 넘게 지나고서도 여전히 그녀가 얼마나 지적이고 강하며, 사랑스럽고 배려심 많은지 경외감을 느끼고 있었죠. 그리고 공직 경력을 쌓아보라는 제 조언을 거부하고 저와의 결혼을 선택한 것을 그녀가 후회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빌었죠.


1년이 조금 더 지나 우리는 리틀 록으로 이주했어요. 전 주 법무장관이 되었고 그녀는 미시시피 서부에서 가장 오래된 로펌에 합류했죠. 곧, 그녀는 가족과 아이들을 위한 아칸소 변호사회(Arkansas Advocates for Families and Children)에 합류했어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여전히 활발한 그룹이죠.


1979년 제가 주지사가 된 직후에, 전 힐러리에게 지역 건강 위원회의 위원장이 되어 고립된 농장 및 산악 지역까지 건강 보험을 확장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했어요. 위원회는 훈련된 간호사들을 의사가 없는 지역에 배치하여 1차 의료를 제공하도록 제안했죠. 큰 수였어요. 매우 논쟁적이었고 무척 중요했죠.


그때 전 그녀가 남은 생애 동안 해야 할 일이 바로 거기에서 했던 일과 같은 것이란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직접 나가서 무엇이 필요한지, 무엇이 가장 합리적인지 무엇이 가장 많은 사람을 도울 수 있을지를 찾아내죠. 만일 그것이 논쟁을 불러일으킨다면 그것이 옳은 일임을 설득하려고 해요.


제가 주지사로서 맞은 첫해 봄에는 이것만이 큰일은 아니었어요. 우리가 부모가 될 거란 사실을 알게 됐거든요. 시간이 지났습니다. 1980년 2월 27일, 제가 워싱턴 전국 주지사 회의에서 돌아온 지 15분 후, 힐러리의 양수가 터졌고 우리는 병원으로 달려갔어요. 자정 직전 첼시가 태어났죠.


이건 제 삶에서 가장 대단한 순간이었습니다. 새로운 시작이라는 기적이었죠. 구멍이 메워지는 느낌이었어요. 제 아버지는 제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거든요. 제 딸은 세상에서 제일 가는 어머니를 갖게 되겠구나 확신했습니다.


이후 17년간 간호학교, 몬테소리, 유치원을 거쳐, 티볼, 소프트볼, 축구, 발리볼, 발레에 대한 열정을 거쳐, 밤샘 파티, 여름 캠프, 가족 여행, 첼시 자신만의 여행을 거쳐, 이웃과의 할로윈 파티부터, 백악관에서의 빈 왈츠 갈라에 이르기까지 힐러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어머니였습니다.


그녀가 종종 말하듯, 그녀는 특별한 책임 유전자를 타고난 것마냥 우리 가족의 전담 걱정꾼이 되었습니다. 사실 그녀는 육아에 있어 저와 거의 의견 충돌이 없었어요. 제가 한 며칠 휴가를 내곤 첼시와 함께 <폴리스 아카데미> 시리즈 6편을 연이어 감상하는 걸 보고 그건 좀 지나치다고 생각한 적은 있지만요.


첼시가 9개월 됐을 때, 레이건 정부 당시 저는 꽤 큰 격차로 재선에 실패했습니다. 제가 알기로 하룻밤 새 역사상 가장 젊은 전직 주지사가 된 거죠. 그땐 주지사 임기가 2년뿐이었어요. 힐러리는 대단했어요. 그 즉시 그녀는 이렇게 말했어요.


“좋아, 이젠 뭘 할까?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아. 집을 얻고, 직장을 얻고, 첼시의 부모로서의 삶을 즐겨야지. 더불어 만일 당신이 다시 출마하고 싶다면 나가서 사람들과 대화하고, 왜 졌는지를 알아내고, 메시지를 받아들였으며 당신이 여전히 좋은 아이디어를 갖고 있음을 보여주어야 해.”


전 그녀의 조언을 받아들였어요. 이틀 만에 집을 얻었고 금세 직업을 얻었죠. 첼시와 환상적인 두 해를 보냈어요. 그리고 1982년, 저는 당선 후 낙선하고 다시 재선된 최초의 아칸소 주지사가 되었죠.


전 제 경험상 그녀의 조언을 받아들였던 것이 정말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요. 남은 십 년은 우리의 삶이 가족과 일터, 친구로서의 운율 속에 자리 잡아가는 동안 쏜살같이 지나갔죠.


1983년, 힐러리는 새로운 교육 기준을 제안하는 위원회에서 의장을 맡게 되었습니다. 학교에의 재정 지원을 균등화하도록 하는 법원 명령과, 슬프게도 우리 주의 재정 곤란 학교들이 미국에서 최악이라는 전문가들의 보고서에 따른 것이었죠.


늘 그렇듯이 힐러리는 위원회와 함께 75개 카운티 전부를 돌아다니며 의견을 청취했습니다. 그녀는 정말 야심만만한 제안과 함께 돌아왔죠. 예를 들어 모든 학교에 초등 상담 교사를 두는 최초의 주가 되자는 것이었죠. 너무 많은 아이들이 집에서 괴로움을 겪고 있어 상담 교사를 필요로 한다고 해서요.


전 이 기준을 통과시키고, 교사의 봉급을 올리기 위해 판매세를 증세하는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의원들을 만났습니다. 전 이 법안이 통과되기 무척 힘들 거라 생각했지만, 힐러리가 교육 위원회와 위원장 앞에서 진술하고 나니 일이 쉬워져 버리더군요. 한 솔직한 농부는 아무래도 잘못된 클린턴을 뽑은 것 같은데, 라고 얘기하더군요.


9년 후 제가 대선에 도전할 때 우리가 미국 최악의 학교를 갖고 있다고 말했던 바로 그 전문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주는 미국에서 가장 발전한 두 개 주중 하나라고요. 힐러리가 개발한 그 기준 덕분이죠.


2년 후, 힐러리는 제게 이스라엘에서 개발된 ‘히피(HIPPY – Home Instruction Program for Preschool Youngsters, 학령전 아동을 위한 가정 교육 프로그램)’라는 학령전기 교육 프로그램에 대해 말해주었습니다. 영어를 읽을 줄 모르는 사람들까지 포함해, 저소득 부모들을 가르쳐 그들이 아이들의 첫 선생님이 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죠.


그녀는 이 프로그램이 아칸소에서도 잘 될 것 같다더군요. 저도 훌륭하다, 어떻게 해야 할까? 하고 물었죠. 그녀는 말했습니다. 사실 이미 했다고 말이죠. 이스라엘에서 프로그램을 처음 시작했던 여성을 불렀고, 열흘간 머물며 프로그램을 시작할 수 있도록 도울 거라고 말이죠.


다음으로 여러분이 아셔야 할 건, 제가 이 학령전 아동 프로그램의 작은 졸업식들에 끌려다녔단 사실입니다. 명심하세요, 이건 그 어떤 주도 유치원 보편교육을 제공하기 전의 일입니다. 돌아다니며 저는 자신의 자녀들을 그렇게 교육시킬 수 있으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가난한 부모님들이 눈물짓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제 20년간의 연구는 이 프로그램이 초등학교 진학 준비 및 학업 성취도를 얼마나 잘 향상시켰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마 이 프로그램을 통해 더 나은 삶을 영위하게 된 젊은 성인 중 힐러리가 무슨 일을 했는지 잘 모르는 사람들도 많을 겁니다.


그녀는 이 모든 일을 전업 노동자이자 어머니이며 부부로서의 삶을 즐기면서 해냈습니다. 어째서일까요? 그녀는 채울 수 없는 궁금증을 가진 타고난 지도자이며 뛰어난 조직인이고, 제가 살면서 만난 가장 훌륭한 변화의 창조자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보세요, 여기에 중요한 포인트가 있습니다. 이번 전당대회에서 알아가야 할 중요한 지점입니다. 당신이 기초부터 완전히 변화를 이룬다는 것을 믿으신다면, 변화의 척도란 얼마나 많은 사람의 삶이 나아졌는지로 평가된다 생각하신다면,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또 얼마나 지루한 일로 여겨지는지도 아실 겁니다.


저처럼 이렇게 연설을 하는 건 즐거운 일입니다. 실제로 일을 하는 건 힘든 일이죠. 그래서 사람들은 쉽게 말합니다. ‘변화가 필요해.’ 그녀는 오랫동안, 마땅하게도, 매 한해 한해 사람들의 삶을 더 나아지게 만들어왔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당신께서 제가 앉아있는 곳에 앉아 제가 매 저녁과 점심 대화에서, 긴 산책 동안 들어왔던 것을 듣게 되신다면, 당신은 아마 이 여성이 그 어떤 것에서도 정체 상태에 만족하지 못한다는 걸 알게 되실 것입니다. 그녀는 늘 공을 앞으로 굴리려 합니다. 그게 바로 그녀입니다.


제가 대통령이 되어 건강 보험 개혁을 위해 전념할 때, 힐러리는 자연히 건강 보험 태스크 포스로 향했습니다. 다들 제가 상원의 필리버스터를 뚫지 못해 실패했다는 걸 아실 겁니다. 힐러리는 즉시 법안이 다루고자 했던 문제들을 하나하나씩 해결하는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목표는 더 많은 아이들에게 건강 보험 제도를 제공하는 것이었습니다.


1997년, 의회는 아동 건강 보험 프로그램을 통과시켰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의 건강보험 개혁안에서도 중요한 일부인 부분이죠. 8백만 명 이상의 어린이들이 건강보험의 적용을 받았습니다. 이 법안에서 그녀가 바위를 언덕으로 밀어 올리듯 하나씩 하나씩 추진해낸 업적들이 이외에도 더욱 많습니다.


1997년, 그녀는 하원 부대표 톰 딜레이와 함께 아동 입양을 늘리기 위한 법안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뉴트 깅리치의 사람들 중 누구보다도 절 싫어할 사람일 겁니다. 그녀는 톰 딜레이가 우리의 모든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그가 아이를 입양한 부모이며 그 점을 명예롭게 생각하기에 함께 작업하기를 원했습니다.


오늘날 그들이 함께 만든 법안은 양당의 압도적인 다수 찬성으로 통과되었으며, 영아가 아닌 아동과 특별한 보살핌이 필요한 아동을 포함해 입양률을 크게 늘렸습니다. 그녀가 만든 변화로 인해 삶은 또 나아졌습니다. 그게 그녀가 한 일입니다.


이 모든 일을 하고서도 진짜 삶이란 끝나지 않는 법입니다. 1997년은 첼시가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에 갔던 해이기도 합니다. 다들 행복했지만, 또 그녀를 떠나보낸다는 것이 슬프기도 했습니다. 전 그녀가 스탠포드의 기숙사 방으로 떠나던 날을 결코 잊지 못할 겁니다. 한 편의 리얼리티 쇼 같았죠. 전 울지 않으려고 창밖을 바라보며 넋이 나간 채 있었고, 힐러리는 몸을 숙이고 시트지를 넣을 서랍장을 하나라도 더 찾아내려 하고 있었죠.


결국 첼시는 우리에게 가야 할 시간이라고 부드럽게 이야기했어요. 우린 우리의 삶 속 가장 중요한 과업의 큰 한 장을 마무리하게 되었죠. 첼시의 목요일 밤 연설에서 보시게 되겠지만, 힐러리는 어머니로서 꽤 멋지게 역할을 해냈어요. 그리고 어젯밤 보신 것처럼, 의심의 여지 없이 미셸 오바마도 그랬죠.


시간을 앞으로 감아보죠. 1999년, 찰리 랑겔 하원 의원과 다른 뉴욕 민주당원들은 힐러리에게 강력하게 권유를 했죠. 팻 모이니핸 상원 의원의 은퇴로 비는 자리에 도전할 것을 말이죠. 제가 사직해 아칸소에서 일하게 된 이후, 우린 언제나 뉴욕에 갈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우리 모두 그럴 기회가 없었죠. 힐러리는 공직에 출마해 본 적이 없었지만, 도전해보기로 결심했죠.


그녀는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마다 늘 그랬던 방식으로 캠페인을 시작했습니다. 듣고 배우는 것이죠. 힘든 싸움 끝에 뉴욕은 한때 또 다른 아웃사이더, 로버트 케네디가 한때 앉았던 자리에 그녀를 선출했습니다.


그녀는 그를 실망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초반 임기는 9/11 테러로 인해 이를 회복하기 위한 기금을 모으고, 희생자와 1차 / 2차 구호자들의 건강을 모니터링하고 보상을 제공하는 데 집중되었죠. 그녀와 슈머 상원의원은 지칠 줄을 몰랐고 우리 하원의원들도 그랬죠.


2003년, 그러한 노력으로 그녀는 뉴욕 역사상 최초로 상원 군사위원회에서 활동하는 상원의원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전장의 사람들이 적절한 장비를 갖출 수 있도록 노력했습니다. 그녀는 예비군과 주방위군의 건강보험 보장 범위를 확대하려 노력했으며 해냈습니다. 도드 상원의원과 함께, 부상당한 군 요원들을 돌보는 사람들을 위한 가족 휴가를 확대했습니다.


또 그녀는 외상성 뇌손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더 광범위하게 돌보기 위해 일했습니다. 펜타곤 특별위원회에서 재직하며 우리가 마주한 새로운 안보 위협에 필요한 변화를 제안했습니다. 뉴트 깅리치도 그 위원회에 있었는데, 그녀가 얼마나 훌륭한 일을 해냈는지 말해주었죠.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건, 진지하게 오늘날의 군 복무자들을 다뤄본 사람이라면 누구도 그들을 재앙과 같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인종과 종교, 삶의 방식을 불문하고 모두 국가의 보물들입니다.


오늘날 그녀는 경제와 사회 문제에서 완전히 진보적인, 굳건한 기록을 거두었습니다. 그녀는 어떤 협정에는 찬성했고 또 어떤 협정에는 반대했습니다. 그녀는 사실상 뉴욕시경 외(外) 뉴욕 주 지역의 경제개발 담당자가 되었습니다. 농부들과 양조자들, 중소기업을 위해 일했고, 더 많은 아이디어와 좋은 직업을 늘리기 위한 투자가 필요한 농촌 지역의 외곽 도시들을 위해 일했습니다. 우리가 미국의 도시 외곽 지역과 작은 마을들, 뒤처진 우리 이웃들과 인디언 거주 지구, 그리고 광산 지구를 위해 다시 한 번 해야 할 일들이죠.


그녀가 2008년 오바마 대통령에게 격전 끝에 패배했을 때 그녀는 오바마 대통령의 당선을 위해서도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내각 합류를 제안했을 때는 주저했는데, 뉴욕 상원의원으로서의 역할을 그만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마치 저처럼, 맥락은 다릅니다만, 오바마 대통령도 계속 요구를 했던 모양이더군요. 하지만 우리가 매들린 올브라이트로부터 보고 들은 것처럼 그건 그만큼 노력을 들여 기다릴 가치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주. 매들린 올브라이트는 같은 날 힐러리 클린턴 지지 연설을 했다)


국무장관으로서 그녀는 이란의 핵 프로그램에 대한 강력한 제재를 위해 일했습니다. 그녀는 월 스트리트 저널이 코트 중간에서 던진 버저비터라 부른, 러시아와 중국의 동참을 이끌어냈죠. 그녀의 팀은 핵무기를 줄이고 사찰을 재개하기 위하여 러시아와 새로운 ‘START’ 조약을 협상했습니다. 그녀는 이를 재가하기 위한 상원 2/3의 동의를 얻기에 충분한 공화당의 지지를 얻어냈습니다.


그녀는 가자에서 하마스와 이스라엘 간의 전면전을 막고 휴전을 성사시킴으로써 지역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밤새 캄보디아에서 중동까지 날아갔습니다.


그녀는 오사마 빈 라덴을 추격하려는 오바마 대통령의 결정을 도왔습니다. 이건 오늘날 정말 중요합니다만, 온라인에서 테러리스트와 맞서 싸우기 위한 팀을 발족하여 새로운 글로벌 테러 방지 대책을 세웠지요. 우리는 정신 영역에서의 이 싸움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그녀는 기후 변화 문제를 우리의 대외 정책 중심으로 설정하였습니다. 그녀는 중국과 인도가 공식적으로 배기가스를 감축하기로 하는 최초의 협정을 체결시켰습니다. 그녀는 1995년 베이징에 방문하여 여성인권이 곧 인권이며 인권이 곧 여성인권임을 말한 이래, 세계적으로 여성의 인권을 북돋고, 같은 지지 선언이 미국과 세계의 성소수자 커뮤니티에서 이뤄질 수 있도록 일해왔습니다.


그리 많이 언급된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이건 제겐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그녀는 여러분의 세금으로 구해지는 빈곤국, 대부분 아프리카에 있는 에이즈 환자들의 수를 추가적인 지출은 조금도 없이 170만 명에서 510만 명으로 세 배나 늘렸습니다. 단지 FDA에서 승인된 복제약들을 구입했을 뿐입니다. 미국인들을 위해 우리가 더 많이 필요로 하는 일이죠.


여러분은 이 사람들을 모를 겁니다. 340만 명의 사람들 누구도 모르실 겁니다. 하지만 제가 보증하건대, 그 사람들은 여러분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들의 생명을 소중하게 여긴다 생각하니까요. 그들은 여러분을 알고 있으며, 그것이 미국에 대한 지지율이 그녀가 국무장관직을 수락했을 때보다 떠날 때 20% 더 높아진 이유 중 하나일 겁니다.


어떻게 앞뒤가 맞을까요?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당신이 들었던 이야기들과 비교하면 어떻죠? 제가 얘기한 것과 그들이 이야기한 것들 사이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실 수 없을 겁니다. 한쪽은 진짜고, 다른 한쪽은 꾸며진 것이니까요. 결정하셔야 합니다. 미국인 여러분, 무엇이 무엇인지를 결정하셔야 합니다.


진정한 힐러리는 서른이 채 되기 전에 다른 많은 공인이 재직 중에 평생 하는 것보다 더 많은 긍정적인 변화를 이루어왔습니다. 진정한 그는, 여러분이 그의 친구 벳시 에블링이 오늘 일리노이 선거인단으로서 투표하는 걸 보셨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유년기 때부터 정작 20년 넘게 살지도 않았던 아칸소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친구를 갖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비로 그들이 아는 바로 그 사람을 위하여 미국 전역을 가로지르며 싸웠습니다.


진정한 그는, 그의 삶의 매 단계마다 함께 일했던 사람들로부터 충실한 존경과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그가 능력 있고 솔직하며 믿을 수 있다 여기는 세계의 지도자들을 포함해서 말입니다. 진정한 그는 당신이 힘들 때, 당신의 아이들이 문제에 처했을 때, 가족이 죽었을 때 당신을 찾아갈 것입니다. 진정한 그는 그가 상원의원일 때와 국무장관일 때, 유력 공화당원으로부터조차 계속해서 상찬을 이끌어 낼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습니까? 정부는 늘 나쁘고 차 두 대짜리 퍼레이드도 망쳐놓을 거라는 이론에 따라 만일 당신이 경선에서 승리한다면, 진정한 변화의 창조자야말로 진정한 위협이겠죠. 그러니 당신의 유일한 선택지는 캐리커처를 그리는 것뿐입니다. 캐리커처로 대체해놓고 캐리커처와 맞부닥치는 것이지요. 그건 2차원적이고 받아들이기도 쉽죠. 진짜 세상에서의 삶은 복잡하고, 진짜 변화는 어렵습니다. 많은 사람은 심지어 그걸 지루하다고 생각하기까지 합니다.


잘하셨습니다. 오늘 일찌감치, 여러분은 진정한 힐러리를 후보로 지명하셨으니까요.


제 길고도 축복받은 삶은, 제가 1971년 봄 한 소녀를 만나 사랑에 빠졌을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제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저는 여러분이 평화와 공영을 나눌 수 있도록, 여러분에게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미국을 만들어드릴 수 있도록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힐러리는 유례없이 검증된 후보입니다. 성공의 기회를 잡고, 우리가 마주한 위협을 줄이기 위해 말입니다. 그녀는 여전히 제가 아는 최고의 변화의 창조자입니다. 어떤 분쟁 지역이든 한 곳을 뽑아 그녀를 데려다 놓으면, 한 달 만에 돌아와 어떻게든 더 나은 결과를 보여줄 겁니다. 그게 바로 그녀입니다.


우리가 마주한 도전들에 대해 분명하고 달성 가능하며 합당한 해답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이 이번 선택에서 잘못된 선택을 한다면 우린 그 해답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여러분이 그녀를 지지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녀는 힘들 때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기에 그녀를 지지해야 합니다. 그녀는 결코 여러분을 저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녀는 날 웨스트버지니아 프라이머리에 보냈습니다. 어차피 질 걸 알고 있으면서요. 그곳에서 광부들을 바라보며 저는 힐러리가 날 보냈으며, 경제를 50년 전으로 돌릴 수 있다고 진정으로 생각한다면, 원하는 사람을 누구든 찍으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승리한다면, 그녀는 여러분을 위해 돌아와 여러분과 미국의 미래를 향해 함께 나아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께도 말씀드립니다. 만일 이 나라를 사랑하신다면, 열심히 일하고, 세금을 내고, 법을 지키고, 시민이 되고자 하신다면, 당신을 돌려보내려 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민 정책 개혁을 선택해 주십시오. 만일 당신이 무슬림이며 미국과 자유를 사랑하고 테러를 혐오한다면, 여기에 남아 우리가 이기고 미래를 함께 만들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우리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당신이 환멸을 느끼고 두려워하는 젊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라면, 우리는 달라스에서 우리 경찰이 얼마나 훌륭해질 수 있는지를 보았으니, 푸른 옷을 입은 이들을 포함해 아무도 밖에서 걸어 다니길 겁내지 않도록, 우리의 미래를 보호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힐러리는 우리를 함께이기에 강하게 만들 것입니다. 여러분은 압니다. 그녀가 일생동안 해온 일이니까요. 여러분이 그리하길 바랍니다. 여러분이 그녀를 선출하길 바랍니다. 살아온 어제가 내일보다 많은 우리는 우리 아이들과 우리의 손자들을 더 돌보려 하기 마련입니다. 그녀를 뽑아야만 하는 이유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나라에서 우리의 목표는 늘 다가올 내일에 대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그리 해 주신다면 여러분의 아이들과 손자들이 여러분을 영원히 축복할 것입니다. 신이 여러분을 축복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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