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렸을 때 내 부모님은 식당을 시작했다. 덕분에 나는 '요식업'이라 부를 수 있는 세계의 일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낭만과 얼마나 거리가 먼 것인지 일찌감치 알게 되었다. 식당을 한다는 건 내려가는 일이 없는 임대료와 상상 초월의 진상 손님, 직원들의 잦은 이직을 견뎌내는 일과 관련 있었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20매의 원고를 쓰고 어느 도시를 가든 매일 일정한 거리를 달리며 보스턴이나 뉴욕 마라톤 등 온갖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거나 취재했던 하루키 특유의 성실성은 그가 운영하던 재즈 카페와도 관련이 있다. 규칙적인 노동 근력은 아마도 그때에 생겼을 것이다.


고베에서 태어난 하루키는 대학을 졸업하기 전 1974년에 고쿠분지역 근처에 '피터 캣'이라는 이름의 가게를 열었다. 몇 년 동안 부지런히 빚을 갚아나가고 가게가 안정될 즈음의 어느 날, 그는 진구 구장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야구를 보다가 문득 "아 나는 이제 소설을 쓰게 되겠구나"라고 생각한다.


그는 부엌에 앉아 틈틈이 소설을 쓴다. 이른바 키친 테이블 노블. 알다시피 그는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로 군조 신인상을 받고, 이후 소설가로 40년 넘게 살았다. 그리고 자신이 어떻게 소설가가 되었고, 소설가는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며, 소설가를 직업으로 삼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한 권의 책으로 써냈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가 그것이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아무튼 효율성이 떨어지는 작업입니다. 이건 '이를테면'을 수없이 반복하는 작업입니다. (…) 이토록 효율성이 떨어지는, 멀리 에둘러 가는 작업은 이것 말고는 없는 게 아닌가, 하는 마음까지 듭니다. 맨 처음의 테마를 그대로 척척 명확히, 지적으로 언어화할 수 있다면 '이를테면'이라는 치환 작업은 전혀 필요 없으니까. 극단적으로 말하면 '소설가란 불필요한 것을 일부러 필요로 하는 인종'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소설가인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교정지를 넘길 즈음이면 자신의 원고만 봐도 구토가 날 정도가 된다는 것이다. 실제 나는 출간된 내 소설을 잘 보지 않는데, 그건 너무 많이 고쳤기 때문에 나타나는 증상 중 하나이다. 하루키는 일 년쯤 시간을 들여 기다란 핀셋으로 병 속에 세밀한 배 모형을 만드는 사람을 예로 들며, 소설 쓰기란 그것과 비슷하단 말을 한다.


물론 한 편의 소설로 벼락처럼 등장하는 소설가도 있다. 하지만 하루키는 어떤 분야의 사람이든 약간의 재능만 있으면 한두 편의 소설을 쓰는 건 어렵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나 직업 소설가가 되어 오랫동안 작품을 쓴다는 건 다른 일이다. 어쩌면 그것은 타고난 재능과는 별개의 영역인 것이다.


"장편소설을 쓸 경우, 하루에 200자 원고지 20매를 쓰는 것을 규칙으로 삼고 있습니다. 좀 더 쓰고 싶더라도 20매 정도에서 딱 멈추고, 오늘은 뭔가 좀 잘 안된다 싶어도 어떻게든 노력해서 20매까지는 씁니다. 왜냐하면 장기적인 일을 할 때는 규칙성이 중요한 의미를 갖기 때문입니다. (…) 이사크 디네센은 '나는 희망도 절망도 없이 매일매일 조금씩 씁니다'라고 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는 매일매일 20매의 원고를 씁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매일 4시간의 작업을 하는 아멜리 노통브의 생산성은 말 그대로 혀를 내두를 정도다. 연말이면 그녀는 조용히 자신의 책상에 앉아, 1년 동안 써놓은 소설 중 어떤 것을 먼저 출간할까 고민한다고 하니 말을 말자. 하루키는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 매일 정해진 시간에 낮잠을 자는데, 그가 듣는 낮잠용 음악도 요요마의 첼로 연주처럼 일정하다.


"아마추어들은 영감이 찾아오길 기다리지만, 우린 그냥 일을 하러 간다"고 말한 건 척 클로스다. 나는 이제 진정성보다 우위에 있는 건 어쩌면 성실성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게 되었는데, 바로 그런 이유로 과거 선배들에게 묻던 질문이 얼마나 바보스러운 것인지 스스로 깨닫게 되었다. "어떻게 해야 작업이 잘되나요?"나 "글이 안 써지면 어떻게 해야 해요?" 같은 질문들 말이다. 10년쯤 작가로 살다보니 글은 '그냥' 쓰는 것이었다. 어쩌면 소설가 천명관의 말처럼 글이란 꾸역꾸역 쓰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루키는 잘 써질 때만 글을 쓴다고 말하지만, 글이 안 써질 때 그가 하는 '번역' 역시 글 쓰는 일의 연장선상에 있다.


매일 하는 일에는 신성함이 깃든다고 믿고 싶다. 밥이 숭고한 건 하루도 거르지 않고 먹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은 아닐까. 예술가의 광기와 뮤즈의 강령은 어쩐지 내겐 천재들의 영역으로 느껴진다. "우리가 무덤까지 가져갈 것은 최선을 다했다는 만족감, 있는 힘껏 일했다는 노동의 증거, 그것뿐이다"라고 말하는 하루키의 말이 그래서 나 같은 범인(凡人)에겐 위안이 된다.


한강의 맨부커상 수상 이후, 번역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다. 이 책엔 1980년대 이후 홀연 미국으로 건너간 하루키가 자신의 책을 알리기 위해 뛰던 고군분투기가 들어 있다. 뉴요커에 단편이 실리게 된 과정이나, 번역가들과의 교류 등 새겨들을 만한 말이 많다. 하루키는 자신의 에세이를 늘 '맥주 회사가 만드는 우롱차' 같은 것이라고 말했지만, 나는 여전히 그의 소설보다 에세이 쪽이 더 좋다. 그리고 이 책을 읽고 난 후 그 이유를 보다 확실히 알게 됐다.


그건 바로 인간 무라카미 하루키가 가진 규칙적인 리듬과 고요한 박력 때문이었다. 나란 사람은 '꾸준함' '성실성' '수줍음' '완벽함을 추구하는 야망' '새로운 것에 대한 모험심' 같은 덕목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이었던 거다. 어쩌면 작가가 된 후, 무엇이든 매일 읽고, 쓰고, 움직인다는 내 원칙의 절반은 그에게 빚지고 있는 것이다. 특히 문학을 한다는 이유로 아름다운 레토릭으로 내 고통을 특권화하지 말아야겠다는 다짐 비슷한 것을 하게 된 것도 그의 글을 읽으면서부터였다. 


장편소설처럼 긴 글을 쓰기에 최적화된 몸을 만들기 위한 노력 역시 그렇다. 이 책의 제목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소설가'를 지우고 '변호사'나 '식당 주인'이라는 말을 넣는다 해도, 역시 이것은 삶을 대하는 우리들의 태도와 방식에 관한 이야기란 생각이 든다. 어쩌면 내가 하루키를 좋아하는 건 그의 글이 아니라, 실은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인간의 삶을 대하는 태도와 특유의 방식 그 자체인 건지도 모르겠다.




출처: 백영옥 소설가님 조선닷컴 글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23&aid=0003185172&sid1=001





[ 백영옥 소설가님 페이스북 글]

하루키는 자신의 에세이를 늘 '맥주 회사가 만드는 우롱차' 같은 것이라고 말했지만, 나는 여전히 그의 소설보다 에세이 쪽이 더 좋다. 그리고 이 책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읽고 난 후 그 이유를 보다 확실히 알게 됐다.


그건 바로 인간 무라카미 하루키가 가진 규칙적인 리듬과 고요한 박력 때문이었다. 나란 사람은 '꾸준함' '성실성' '수줍음' '완벽함을 추구하는 야망' '새로운 것에 대한 모험심' 같은 덕목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이었던 거다. 어쩌면 작가가 된 후, 무엇이든 매일 읽고, 쓰고, 움직인다는 내 원칙의 절반은 그에게 빚지고 있는 것이다. 특히 문학을 한다는 이유로 아름다운 레토릭으로 내 고통을 특권화하지 말아야겠다는 다짐 비슷한 것을 하게 된 것도 그의 글을 읽으면서부터였다. 장편소설처럼 긴 글을 쓰기에 최적화된 몸을 만들기 위한 노력 역시 그렇다.


이 책의 제목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소설가'를 지우고 '변호사'나 '식당 주인'이라는 말을 넣는다 해도, 역시 이것은 삶을 대하는 우리들의 태도와 방식에 관한 이야기란 생각이 든다. 어쩌면 내가 하루키를 좋아하는 건 그의 글이 아니라, 실은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인간의 삶을 대하는 태도와 특유의 방식 그 자체인 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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