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만의 공간이지만, 또 그 누군가의 공간이기도 하기에 당부합니다. 


아래에 적은 글은 책의 문맥을 적은 것이 아니라 일부 문장에 불과합니다. 이에 자칫 신교수님의 생각을 오해하여 받아들일 수 있다는 걱정이 앞섭니다. 그런 분들은 책의 전문을 참조하시기를 강하게 권하고 싶습니다. 

누군가의 생각과 사상 일부만 떼어서 본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가 그런데도 일부의 문장을 아래에 적은 것은 

1. 이곳은 저의 공간이라고 인식한 점 

2. 저는 문장을 통해, 문맥의 내용을 기억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도 위에 당부를 드린 것은, 서두에 적었듯 이곳은 저만의 공간이지만 또한 그 누군가의 공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소 논리의 어색함, 비논리적인 문장임을 자인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우연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어느 날 문득 인연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인연들이 모여서 운명이 되기도 합니다. 여기저기 우연의 점들을 찍어 나가다 그것이 서로 연결되어 선이 되고 인연이 됩니다. 그리고 인연들이 모여 면이 되고 장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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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은 세월과 함께 서서히 잊혀 가다가 어느 날 문득 가슴 찌르는 아픔이 되어 되살아나는 것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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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는 뜨거운 공감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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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결코 과거를 정직하게 재현하는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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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이상은 반드시 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이상은 현실의 존재 형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실은 우리의 인식 속에서 끊임없이 이상화되고 반대로 이상은 끊임없이 현실화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상과 현실이 각각 다른 사회적 집단에 의해서 담보되기 때문에, 이상과 현실은 서로 충돌하고 다투는 형식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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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과 실천은 함께 갑니다. 실천의 경험을 정리하면 이론이 됩니다. 이 이론은 다음 실천의 지침이 되고 동시에 그 진리성이 검증되면서 이론의 발전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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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개혁 실천의 경우라 하더라도 당대 사람들의 보편적 공감 속에서 진행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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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을 존중하되 이룰 수 없는 꿈, 그걸 놓으면 안된다는 것이지요. 현실의 조각 그림을 뛰어넘어 진실을 창조하려고 하는 고민이 바로 이상과 현실을 결합하려는 노력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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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은 복잡한 것을 간단하게 압축하는 것이고, 상상력은 작은 것으로부터 큰 것을 읽어 내는 것입니다. 

: 복잡한 문제에 직면했을 때 가장 필요한 것이 추상력입니다. 문제의 핵심을 파악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공부하는 것은 핵심을 요약하고 추출할 수 있는 추상력을 키우기 위한 것입니다. 문제를 옳게 제기하면 이미 반 이상이 해결되고 있다고 합니다.


: 작은 것, 사소한 문제 속에 담겨 있는 엄청난 의미를 읽어 내는 것이 상상력입니다. 빙산의 몸체를 볼 수 있는 상상력을 키워야 합니다. 세상에 사소한 것이란 없습니다. 다만 사소하게 나타났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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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 높은 설산에 사는 토끼가 가장 조심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 동상이 아닙니다. 평지에 사는 코끼리보다 자기가 크다고 착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부려서 하는 일이 자기의 능력이라고 착각하면 안 됩니다. 사람과 자리를 혼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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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완성이 없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실제로 완성 괘는 이 미완성 괘 앞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완성이라고도 하더라도 그것은 다만 어떤 국면의 완성일 뿐 궁극적인 완성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 미완성은 목표보다는 목표에 이르는 과정을 소중하게 여기게 합니다. 완성이 없다면 남는 것은 과정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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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도 없으면서 지나치게 꾸미는 것보다는 차라리 다소 거칠더라도 진실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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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것과 못 본 것의 엄청난 차이에 관한 것은 생사가 갈리는 차이입니다. 본다는 것은 만남입니다. 보고, 만나고, 서로 아는, 이를테면 관계가 있는 것과 관계 없는 것의 엄청난 차이 입니다. 옛 선비들이 푸줏간을 멀리한 까닭은 그 비명 소리를 들으면 차마 그 고기를 먹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아닙니다. 생선 횟집에 들어가면서 수조 속의 고기를 지적하여 주문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우리 사회의 인간관계가 그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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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는 전략이 아니라 삶의 철학이라는 것입니다. 산다는 것은 사람과의 만남입니다. 그리고 사람들과의 만남이 연대입니다. 관계론의 실천적 버전이 연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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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관계의 흔적이고, 소통의 결과로 생겨나는 주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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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술사가 독자에게 던지는 메세지는 손에 넣게 되는 금이 아닙니다. 그 긴 유랑의 매 순간이 바로 황금의 시간이라는 선언입니다. 마찬가지로 자기 변화와 개조 역시 그 과정 자체가 최고의 가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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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변화는 최종적으로 인간관계로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기술을 익히고 언어와 사고를 바꾼다고 해서 변화가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최종적으로 자기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가 바뀜으로써 변화가 완성됩니다 이것은 개인의 변화가 개인을 단위로 완성될 수는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자기 변화는 옆 사람만큼의 변화밖에 이룰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자기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가 자기 변화의 질과 높이의 상한입니다. 같은 키의 벼 포기가 그렇고 어깨동무하고 있는 잔디가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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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는 파괴와 살인이고 전쟁은 평화와 정의라는 논리가 바로 강자의 위선입니다. 테러가 약자의 전쟁이라면, 전쟁은 강자의 테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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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는 우리의 동공을 외부로 향하여 여는 세계화가 아니라 우리의 내면을 향하여 심화하는 인간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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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보다 못하고, 마음 좋은 것이 손 좋은 것만 못하고, 손 좋은 것이 발 좋은 것만 못한 법입니다. 관찰보다는 애정이, 애정보다는 실천적 연대가, 실천넉 연대보다는 입자으이 동일함이 더욱 중요합니다. 입장의 동일함 그것은 관계의 최고 형태입니다.

: 관계의 최고 형태는 입자으이 동일함을 훨씬 뛰어넘는 곳에 있습니다. 서로를 따뜻하게 해 주는 관계, 깨닫게 해 주고 키워 주는 관계가 최고의 관계입니다. 입장을 경제적 계급의 의미로 읽는 것 자체가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에 포획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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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부심은 고난을 견디게 합니다. 물질적 도움보다는 자부심을 갖게 하는 것이 더 큰 힘이 됩니다.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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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떠나고 만나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종착지는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는 것, 변화된 자기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조는 비단 여행에서만 확인되는 것은 아닙니다. 생각하면 여행만 여행이 아니라 우리의 삶 하루하루가 여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소통과 변화는 모든 살아 있는 생명의 존재 형식입니다. 부단히 만나고, 부단히 소통하고, 부단히 변화하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여행도 그렇고, 우리의 삶도 그렇고, 우리가 함께 만들고 있는 인문학 교실도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가합니다. 떠남과 만남과 돌아옴 중에서 가장 결정적인 것은 만남입니다. 다른 사람과의 만남 그리고 자기와의 만남입니다. 떠나는 것도 그것을 위한 것입니다.

: 또한 여행은 돌아오는 것입니다. 떠나고 만나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 전과정이 자기 변화로 이어지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것은 아무리 멀고 이동하고 아무리 많은 것들을 만났더라도 진정한 여행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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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도 경쟁력을 강화히기 위해서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고 이 발상의 전환을 강조하는 예로서 콜롬버스가 등장합니다. 콜롬버스는 책상 위에 세우지 못하는 계란을 세웠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단지 발상의 전환에 관한 일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계란의 모양은 어미 닭이 체온을 골고루 줄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입니다. 모든 알이 그렇습니다. 어미 품을 빠져나가 굴러가더라도 다시 돌아오게끔 만들어진 타원형의 구적입니다. 바로 생명의 모양입니다. 이것을 깨트려 세운다는 것은 발상의 전환이기에 앞서 생명에 대한 잔혹한 폭력입니다. 잔혹한 폭력을 발상의 전환이라고 예찬하는 우리의 무심함은 무심함이 아니라 비정함에 다름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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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하의 오랜 잠류를 견딜 수 있는 공고한 신념, 그리고 일몰에서 일출을 읽을 수 있는 열린 정신이 바로 지식인의 참된 자세인지도 모릅니다.

: 그런데 뒤늦게 깨달은 것이지만 그 당시에는 별로 학생운동에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지만 꾸준히 그 길을 지키고 있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그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 때문에 함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신의 이념이나 사명감 때문이 아니라 친구들의 권유를 외면한다면 두고두고 양심의 가책으로 남을 것 같아서 참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꾸준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감옥에서 예상했던 것과 반대였습니다. 양심적인 사림이 가장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김수영 시인의 시처럼 바람보다 먼저 눕지만,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풀이었습니다. 양심적인 사람은 우리 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매우 낮습니다. 낮을 뿐 아니라 부정적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양심적인 사람이야말로 가장 강한 사람이며 가장 인간적인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식인이란 모름지기 양심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 이외의 역량은 차라리 부차적인 것이라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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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정체성이란 내가 만난 사람, 내가 겪은 일들의 집합이라고 생각합니다. 만난 사람과 겪은 일들이 내 속에 들어와서 나를 구성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과 일들로부터 격리된 나만의 정체성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결국 나는 관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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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버섯은 사람들의 식탁의 논리입니다. 버섯을 식용으로 하는 사람들의 논리입니다. 버섯은 모름지기 버섯의 이유로 판단해야 합니다. 자기의 이유ㅡ 이것은 우리가 지켜야 할 자부심이기도 합니다. 자기의 이유를 가지고 있는 한 아무리 멀고 힘든 여정이라 하더라도 결코 좌절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이유를 줄이면 ‘자유’가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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