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24일, 노키아의 초청을 받아 핀란드 에스푸에 왔습니다. 수도인 헬싱키에서 20분 정도 거리에 있는 노키아 에스푸 캠퍼스는 꽤 큼직한 규모입니다. 핀란드 전체에서 노키아 직원은 약 6천명인데 이 캠퍼스 안에 2600명이 근무하고 있고, 내년 초 900명 정도를 더 뽑을 계획이라고 합니다. 이 정도면 현재 마이크로소프트에 넘어간 과거 본사보다 더 큰 규모입니다. 그러고 보니 사진으로만 보던 멋진 그 건물은 이곳에 없고 에스푸 다른 지역에 있다고 합니다. 이곳에서는 LTE의 표준화에 대한 연구를 비롯해 기지국 장비를 설계하고, 5G망에 대한 기술 개발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nokia_04

기업들이 기자를 본사로 초청하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이번 노키아의 경우 신제품이 나오거나 특별한 발표 내용이 준비돼 있는 건 아닙니다. 심지어 첫날 일정의 대부분은 네트워크 기술 관련 교육에 쏠려 있습니다. 그렇지만 전체적인 분위기상 노키아가 의도한 바는 결국 휴대폰 단말기 사업을 정리한 뒤의 새로운 사업에 대한 방향성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노키아는 최근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습니다. 노키아코리아의 조봉열 박사는 최근 “만날 때마다 계속 다른 명함을 주게 된다”는 농담을 건넬 정도로 어찌 보면 혼란스러운 과정을 겪고 있습니다. 멀리 갈 것도 없습니다. 지난 1년만 돌아봐도 이 회사는 만만치 않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노키아 변화의 신호탄은 지난 9월, 휴대폰 단말기 사업부의 매각을 추진하는 데서 시작했습니다. 그게 벌써 1년이 됐습니다. 노키아는 2013년 휴대폰 사업 매각 발표와 거의 동시에 2007년부터 이어져 온 조인트벤처 노키아지멘스네트웍스(NSN) 시대를 정리했습니다. 노키아의 방향성을 단말기에서 네트워크로 바꿨다는 신호탄이었습니다. 그렇게 NSN은 노키아솔루션네트웍스의 약자로 바뀌었습니다. 다시 올해 4월말 마이크로소프트에 사업부 매각이 끝난 직후에는 NSN을 회사의 중심으로 세우고 아예 노키아가 됐습니다.

회사의 수장도 NSN의 CEO였던 라지브 수리가 맡았고, 최근 일어난 인수합병도 대부분 네트워크 설비와 관련된 기술들입니다. 이종 네트워크 망을 설계하는 NICE나 RF소자의 필터링 기술을 갖고 있는 메사플렉스 등입니다. 최근에는 파나소닉의 네트워크 사업부 인수 작업도 진행 중입니다.

nokia_02

왜 네트워크일까요. 노키아는 원래 통신 관련 시스템을 만들던 기업입니다. 그런데 1871년 설립 이후 150여년 간 회사가 휘청거렸던 것만 해도 4번이나 됩니다. 그 동안 노키아는 전화기나 TV등 전자 기기를 만들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펄프를 가공하고 화장지를 만들던 사업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결국 세상은 바뀌고, 그에 맞춰 회사의 방향성을 바꿔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그렇게 노키아는 회사 사업부를 3개로 정리했습니다. 통신 네트워크, 지도, 특허 등입니다.

마이야 타이미 기업 홍보 책임은 “스마트폰 사업을 떼어냈지만 여전히 노키아의 목표는 ‘사람을 연결한다(Connecting people)’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과거에는 휴대폰을 통해 사람을 연결했지만 이제는 네트워크와 지도를 통해 사람 사이를 가깝게 연결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결국 “모든 것이 연결되는 시대에서 기술을 선도하겠다”는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노키아의 새로운 목표는 여전히 통신입니다. 현지에서 만난 노키아 직원들은 모두 “통신이 휴대폰, 스마트폰이라는 단말기가 아니라는 것이 변화의 초점”이라고 입을 모았습니다.

nokia

돌아보면 노키아는 세계에서 가장 큰 B2C, 즉 소비자 대상 기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직접 소비자와 얼굴을 맞대는 비즈니스가 거의 없습니다. 단말기 사업 부분을 매각할 때까지도 노키아는 여전히 개수로는 가장 많은 휴대폰을 팔던 회사였습니다. 사업의 방향성을 바꾸는 것을 ‘피봇’이라고 부르는데, 한 기업이 주축이 되는 커다란 비즈니스를 바꾸는 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네트워크 기술의 본질에 더 가깝게 접근하고, 그 안에서 센서가 만들어내는 정보를 가공하고, 지도를 통해 고도화시키는 비즈니스에 일단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실제 이날 이어진 기술 발표에도 기지국에 서버를 직접 붙여 스스로 상황을 판단하고, 데이터를 캐시하거나 심지어 본래 네트워크와 끊어져도 그 기지국의 범위 안에서는 통신을 가능케 하는 통신 기술을 소개했습니다. 그 끝에는 “현재 한국에만 적용돼 있다”는 이야기가 어김없이 따라붙었습니다. 모든 기술은 한국을 거쳐서 다른 나라로 넘어간다고 합니다.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쓰지만 야구장, 불꽂축제 같은 특수 환경에서 고속 네트워크를 꾸리는 기술들 이야기입니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노키아가 스마트폰 시장에서 심비안을, 윈도우폰을 고집한 것이 이 회사로서는 현재 좋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안드로이드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쓰는 플랫폼이긴 하지만 정작 그 시장에 뛰어든 제조사들은 휴대폰을 팔아 거의 돈을 벌지 못하고 있습니다. 노키아는 윈도우라는 환경을 골랐고, 늘지 않는 점유율에 대한 위기 상황을 마이크로소프트에 넘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비용으로 회사를 재편하고 있습니다. 과연 노키아가 안드로이드를 택했다면 어땠을까요. 참, 여기 노키아 직원들의 상당수는 아직 윈도우폰을 쓰고 있더군요.

Nokia-Lumia-930-Beauty1

어떻게 보면 이제 노키아가 직접 소비자들의 입에 오르내릴 일은 점점 줄어들 것 같습니다. 남아 있는 비즈니스는 모두 기업을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더 우리 곳곳에 파고 들어올 계획들이 눈에 띕니다. 현재 국내 LTE 기지국 장비 시장에서 노키아는 30%를 차지하고 있고, 국내에서 속속 성장하고 있는 수입차에는 노키아 지도가 들어가고 있습니다. 지도는 국내에서 아직 턱없이 부족하지만 곧 대대적인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아직 안개속에 있는 5G 사업도 결국 한국이 첫번째 테스트 환경입니다. 노키아코리아 원재준 대표는 국내 네트워크 장비 기업의 기술들을 노키아에 심을 계획도 갖고 있다고 합니다.

노키아의 변화는 좋은 지표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현재 노키아의 매출은 대부분 네트워크에서 나옵니다. 2분기 실적을 보면 전체 30억유로 매출 중 26억유로가 네트워크이고, 네트워크 부문 수익률은 약 11%입니다. 지도는 매출이 2억유로 정도지만 실제 수익은 거의 나지 않습니다. 대신 특허 부문의 매출은 1억5천만유로 정도로 작지만 수익률은 65%에 달합니다. 주식 시장의 평가도 최근 1년 새 50%가 높아졌습니다.

nokia_03

여기 에스푸의 노키아 네트워크 사업부 직원들은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이곳에서 일하고 있는 한국인 황원희 씨도 회사가 매우 안정적이라고 말합니다. 사업부가 매각되는 과정에서도 네트워크 부문은 수익을 잘 내고 있었고, 직원도 꾸준히 늘어가고 있었다고 합니다. 황원희 씨는 “노키아가 휘청이는 바람에 핀란드 경제가 휘청거렸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유럽 전체가 불황을 겪고 있기 때문에 그리 놀랍지는 않은 일이었다”고 하더군요. 핀란드에서 다른 회사에 다니는 친구들과 만나는 자리에서도 각 기업들이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하고 있기 때문에 노키아의 상황이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고 합니다.

저는 에스푸에서 이틀간 노키아의 기술들을 보고 돌아갈 계획입니다. 다음엔 노키아가 어떤 기술들을 준비하고 우리 네트워크에 적용하고 있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출처:
http://www.bloter.net/archives/207716?utm_content=buffer6588e&utm_medium=social&utm_source=twitter.com&utm_campaign=buffe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