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 동안 ‘마케팅이란 무엇인가?’라는 똑같은 기말고사 문제를 고수하던 어느 교수님, 족보를 달달 외워서 기말고사를 치르러 들어온 수강생들 앞에서 칠판에 ‘도’를 적고 돌아서서는 학생들을 향해 회심의 미소를 날린다. 니들은 다 죽었어… 하얗게 질린 학생들을 비웃듯 문제를 이어가는 교수님. 그날 문제는 ‘도대체 마케팅이란 무엇인가?’ 였다는, 믿기지 않지만 오랫동안 끈질기게 이어 내려오는 전설따라 삼천리 같은 얘기다.

내 경험에 어떤 과목도 과목 이름을 설명하라는 문제는 받아 본 적이 없다. 회계원리는 무엇인가, 민법총칙은 무엇인가, 이런 문제는 없지 않은가? 물론, 마케팅이란 무엇인가도 황당하기는 한데, 그래도 사람들 생각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조금은 남아 있으니 이 얘기가 계속 전해지는 것 아닐까? 그만큼 마케팅이란 용어는 만만치 않다.

내가 운영하는 ‘개발마케팅연구소’의 모토는 “개발협력에 마케팅을 더하라”이다. 모토를 그대로 명명에 응용했다. 그러고 나니 개발협력계 종사자 일부는 이 이름부터 심기가 불편하시단다. 신성한 개발협력 마당에 어디다 대고 ‘마켓’을 들먹이냐는 반응이다.

그 바탕에는 현재 개발도상국이 겪는 빈곤을 식민주의자들, 그러니까 국가독점 자본주의자들이 만들었고, 신자유주의가 더욱 심화했다고 하는 생각이 깔려 있는 듯하다. 거칠게 요약하면, 식민주의 ≒ (국가독점)자본주의 ≒ 신자유주의 ≒ 시장만능주의 라고 보고, ‘시장은 나쁘다’로 결론을 내린 모양이다. 시장(market)이 나쁘니 그 현재진행형 내지는 동명사 형태인 marketing은 똑같이 재수없다… 뭐 이런 추론을 내린 모양이다.

이미 10년 전에 마케팅의 구루인 필립 코틀러가 공공부문에도 마케팅을 도입하자며 ‘Public Marketing’을 출판했고, 나는 공공사업을 대상을 해외까지 연장해 생각한 것이다. 개발협력계가 돌아가는 현실을 보면, 개발도상국 정부가 계속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그것을 공여국 정부(또는 그들의 연합체)가 자꾸 대신하려는 (물론, 말로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경향을 현실로 받아들이던, 그 현실을 타개하려고 주장하던 가장 현실적인 방법론은 역시 마케팅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마케팅에 대한 이해가 빈곤하여 빈곤에 대한 마케팅 기법 도입이 의심받는 상황이다. 대책은 마케팅을 이해하도록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역시 쉽지 않다…

 

마케팅은 어렵다

우리나라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는 그룹에서 아프리카 시장진출 전략을 짰다. 그룹 사장단 회의에 보고하느라고 2달여를 끙끙대며 만들었다. 그런데 아프리카 지역시장에 밝은 내부 전문가가 없으니 불안했던 모양이다. 나를 찾았다. 만나기 전에 일단 이메일로 자료를 보내라고 했더니 비밀자료라면서 몽땅 출력해서 들고왔다. (그리고 그걸 내게 주고 갔다. 뭐가 비밀이라는 건지…)

자료를 대충 살펴보고 내가 물었다.

“마케팅 전략을 경제학 박사들이 짰나 보군요”
“어떻게 아셨어요?” 하며 놀란다.

어떻게 알긴… 두꺼운 보고서 앞부분이 모두 가정(assumption)으로 채워져 있었다. 아프리카 시장이 이러할 것이다. 저러할 것이다… 하는 가정을 여러 개 세워놓고, 그 가정들을 이리저리 짜나가면서 전략을 세운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일하는 대표적인 직업이 바로 경제학 박사들이다.

내가 다시 물었다.

“근데 어쩌죠?”
“왜요?”
“앞에 있는 가정들이 사실이 아니라서요…”
“예?!”

두 달 이상을 고생했고, 사장단 보고가 코앞인 상황에서 얼마나 당황했을까? 가정이 사실이 아니니, 그걸 어떻게 엮어도 사실이 아닌 결론이 나오게 된다. 여기에 그 결론을 공개하면 박장대소할 분들이 많겠지만, 명색이 컨설턴트인 내가 그럴 수는 없고…

그 가정 가운데 두어 개를 정정해 주었다. 당황한 얼굴로 돌아가면서 곧 연락을 주마 했던 그 담당자는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지금까지 연락이 없다. 물론, 대기업도 어이없는 실수를 할 때가 있고, 당황스러울 수도 있다. 대기업일수록 1인 기업과 거래하는 것은 어렵다. 그렇다고 공짜 컨설팅을 받아 챙기고 전화 한 통 없는 걸 보면, 참 한심하다. 그래도 기업 이름을 공개하지는 않는다. 평판을 관리하는 것도 중요한 내 마케팅 전략이니까…

이런 과정을 상상으로 시작하면 전략이 소설이 된다.
이런 과정을 상상으로 시작하면 전략이 소설이 된다.

 

그러나, 마케팅은 쉽다

위 얘기를 읽고, 대기업에 모인 경제학 박사들도 어이없는 실수를 할 정도로 마케팅은 역시 어렵구나…하고 지레 질릴 필요는 없다. 마케팅은 그렇게 배우는 게 아니다.

예전에 내가 수산물 거래를 하던 시절이 있었다. 동해안에서 오징어를 반가공한 상태로 만들어 일본에 수출했었는데, 한 번은 스펙에 문제(품질이 아닌 주문서상 스펙과 다른 문제)가 생겨 일본에서 shipback(반품)을 당했다. 그걸 만회하느라 재가공을 해서 아예 완제품을 만들어 내수시장으로 돌렸는데, 거기서 임사장(가명)이라는 대단한 분을 만났다.

임사장은 강원도 어촌 출신으로 중학교를 겨우 졸업하고 주문진에 있는 수산물 가공공장에서 일을 시작, 업주의 신임을 받았다. 그 공장이 우리나라 건어물의 메카인 중부시장에 직영점을 내면서 파견을 나와 죽도록 일한 결과, 가게 한 칸을 받아 독립하였다.

중부시장은 등기상 하나의 지분으로 설립되어 있고, 그 지분을 99개로 분할하여 점주들이 나눠 가지고 있다. 기존 점주가 죽거나 사업을 접고 낙향하거나 해야 한 자리가 겨우 빈다. 1999년 당시 임사장의 한 달 매출이 13억 원 정도였다. 건어물이나 판다고 우습게 볼 일이 아니다.

이 분이 대한민국 건어물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남겼는데, 최초로 쥐치포를 해외에서 조달해 낸 것이다. 국내산 쥐치포의 명맥이 끊길 무렵 나타나 건어물계를 평정한 베트남산 쥐치포, 그 역사를 장본인에게 직접 들을 수 있는 영광을 누렸다.

언젠가부터 산지에서 쥐치포가 잘 올라오지 않자, 답답한 임사장은 산지에 직접 내려가 보았다. 가보니 근본적 문제는 쥐치포가 아니라 쥐치였다. 예전에는 먹지도 않았던 생선인데, 쥐치포가 대유행하고 십수 년이 지나자 씨가 마른 것이다. 쥐치가 없으면 쥐치포는 만들 수 없다. 당연하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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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사장은 사업장을 직원들에게 맡겨 두고, 영어를 할 수 있는 직원 (건어물 가게에도 있다!) 한 명만 대동하고 동남아 일대를 뒤졌다. 베트남에서 쥐치를 찾았다. 거기서도 쥐치는 먹지 않는 생선이었다. 어느 어촌에 들어간 임사장은 촌장을 설득해 시험 조업에 나섰고, 어민들과 같이 잡은 쥐치를 직접 가공하면서 가공 설비를 마련해주고 가공 기술을 꼼꼼히 가르쳤다. 한 달여를 고생한 끝에 만족할만한 품질이 나오자 선불을 주고 거래를 시작했다.

여기서 나온 쥐치포가 얼마나 인기가 있었던지, 선적만 하면 부산항에 입항하기도 전에 다 팔려나갔다. 한동안 임사장은 쥐치포 시장을 독점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상황을 눈여겨 본 인근 업주가 같은 과정을 중국에서 밟았는데, 결과적으로 쫄딱 망했다는 것이다. 이건 중국과 베트남의 차이가 아니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임사장은 수산물 가공 공장에서 밑바닥 생활을 겪었다. 덕분에 베트남에서 가공 기술을 직접 가르쳐 줄 수 있었다. 품질관리의 핵심을 직접 컨트롤 할 수 있었다. 반면에, 인근 업주는 대학을 졸업한 상속자였다. 샘플을 들고 며칠 출장을 가서 ‘이런 것을 만들어 달라’고 하니 그냥 비슷한 (그러나 다른) 물건이 도착한 것이다. 구멍이 숭숭 뚫리고, 온통 울퉁불퉁한 쥐치포(비슷한 물건) 때문에 클레임이 꼬리를 물고, 결국 그로 인해 망했다.

결과만 놓고 비교해 보면 생산관리 또는 품질관리의 승리처럼 보인다. 하지만 크게 봤을 때 이건 그것을 포함한 마케팅의 승리다. 임사장의 행동을 마케팅 관점에서 분석해 보자.

임사장은 시장의 변화를 민감하게 알아챘다. 수요 측면이 아니라 공급 측면에서. 시장변화 핵심문제를 파악한 후에는 바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 들어갔다. 공급선을 수배하고, 시장이 요구하는 품질 기준에 맞춰 생산 과정을 디자인하고 직접 생산을 주도했다. 시장이 감내할 수 있는 최대치의 가격을 받았으며, 다른 경쟁사가 비집고 들어올 수 없을 만큼 생산자에게 후한 보상을 주었다. 걸어다니는 마케팅 교과서라 해도 손색이 없다.

마케팅의 m자도 모르는 임사장에게 물었다. 도대체 그런 걸 다 어디서 배웠나? 무뚝뚝한 임사장은 “그냥 시장에서 배웠다”고만 답했다. 시장에서 물건이 부족하면 누구나 다 그렇게 대응하는 게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그렇다. 마케팅은 역시 마켓에 답이 있다.

쥐치포도 진화하는구나…
쥐치포도 진화하는구나…

 

마케팅을 꼭 배워야 할 수 있을까?

그래도 임사장은 시장에서 잔뼈가 굵었고, 그 분야에서 이미 전문가의 반열에 드는 사람이니 (예외적으로 탁월하기는 해도) 그럴 수 있다고 치자. 이번에는 생전 처음 보는 분야에서도 마케팅을 잘하는 분을 소개한다.

지난해 민관협력 사업 평가차 아프리카 모처를 방문했다. 한국 NGO가 현지인들에게 농업기술을 가르치는 현장인데, 직접 가서 보니 좀 황당했다. 시범농장에서는 시장에서 원하지도 않는 작물을 키우고, 시중에서 수리용 부품도 구할 수 없는 한국산 경운기 작동법을 교육시키고 있는가 하면, 훈련생이 집에 돌아가서는 절대 재현할 수 없는 럭셔리한(1개 동을 짓는데 1억 원이 들었다는) 수준의 양계장에서 실습을 하고 있었다. 오 마이 갓…

문제는 사업 관리자 모두가 한국인 선교사분들이라는 것. 그 착한 마음은 의심할 바가 못 되지만, 사업은 착한 마음으로만 할 수가 없다.(참고: 反시장적 원조는 위험하다 ─ 착한 생각만으로는 부족하다)

평가팀과 사업을 수행하는 NGO는 고객에 대한 인식, 수요 파악과 대응 등등을 협의하였고, 급기야 평가는 컨설팅이 되고 말았다. 그 가운데 재미있는 것은 거기서도 ‘김부장(역시 가명)’이라는 마케팅 교과서를 만난 일이다.

김부장은 중국 교포다. 흑룡강성 출신으로 고향에서는 건설현장을 전전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Chinese Invasion이라 불리는, 중국의 아프리카 대거 진출 바람을 타고 먼 곳까지 와버렸다. 현지에서 동족인 한국인 커뮤니티를 알게 되고, 비전 없는 건설현장에서 벗어나 뭔가 다른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의적인 한국인 선교사들에게 부탁하여 농업기술 훈련장 한 켠을 빌려서 조그만 농사를 짓고 있었다.

그런데, 김부장의 작은 ‘농장’이 압권이다. 정확하게 시장에서 요구하는 작물들이 아주 잘 자라고 있었다. 전문가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는데, 장본인은 한사코 그렇지 않다고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그런 일을 했느냐고 묻자, 그는 담담하게 설명했다.

무슨 작물을 키워야 할지 몰라서 한국인, 중국인, 현지인들을 만나 물어봤다. 언제쯤, 어떤 품질의 작물이 얼마나 필요하냐, 가격은 얼마쯤 생각하냐 등등을 꼼꼼하게 물어보고 키울 작물을 결정했다. 평생 농사를 지어 본 적이 없어서 각 작물마다 잘 키운다는 농장에 가서 직접 눈으로 보고 꼬치꼬치 재배방법을 물어봤다. 그리고 들은 그대로 키워서 시장에 내다 팔았다. 비법? 그런 건 모른다.

더 이상 간단할 수가 없다. 게다가 한국어는 겨우 의사소통이 가능한 수준이고, 현지어는 필수 단어 몇 개를 툭툭 던지듯 말하는 수준이다. 하지만 철저한 시장조사를 실시하고 그 결과에 따라 대응을 해 나가는, 김부장은 그야말로 마케팅 교과서였다.

선교사분들에게 물었다. 왜 김부장을 따라 하지 않느냐고. 제대로 배우지도 못한 사람이 살아보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가상해서 도와주고 있을 뿐, 다른 마음은 없다고 했다. 난 그분들께 다른 마음을 가지셔야 한다고 조언을 드렸다.

이 분은 농업의 신인가, 아님 마케팅의 신인가? (CJ헬로비젼 화면)
이 분은 농업의 신인가, 아니면 마케팅의 신인가? (CJ헬로비전 화면)

 

마케팅은 마켓에서 배운다

선교사라는 직업 특성상 시장을 잘 모르거나, 시장 메커니즘을 부정하기 쉽다. 그보다는 소명이 중요하기 때문이겠지만, 대상이 시장에 관련된 것이라면 시장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故 이태석 신부님도 의료선교를 위해서 의사가 되지 않으셨나?

또, 김부장이라는 대상이 우리말도 어눌한 조선족이기 때문에 그로부터 배운다는 생각을 어렵게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마케팅이라는 외래어 단어는 뭔가 심오한 뜻을 갖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마케팅이라고 하면 현란한 수사법과 갖은 통계 방법을 동원한 복잡한 보고서 등을 떠올리기 쉬운데, 그것들은 마케팅의 말단이지 핵심이 아니다.

마케팅의 전 과정은 시장을 관찰하고, 수요와 문제의 원인을 파악하고, 거기에 합리적으로 대응하는 방법의 연속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케팅은 비즈니스가 아니더라도 적용할 대상이 무궁무진하다. (참고: 운동권에서도 필요한 마케팅 기법) 그런 핵심을 비켜나서 온갖 지엽말단의 문제들을 마케팅의 전부인 양 떠벌이는 사람들은 그걸로 먹고사는 사람들이다.

마케팅은 마켓에서 배운다는 원칙 아닌 원칙에 마음으로부터 동의한다면, 그 다음에 필요한 기술은 필요할 때, 필요한 만큼 배우면 된다.

오늘도 마케팅은 마켓에서 여러분을 기다린다.


출처: http://ppss.kr/archives/5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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