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 FATHER. 

야구에 시범경기라는 것이 있다. 본 시즌이 시작하기 전 선수들의 상태를 점검하고, 팀을 다시 한 번 리빌딩할 수 있는 기회이다. 

누군가에게는 2군에서 1군으로 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실수로 인하여 1군에서 2군으로 떨어질 수 있는 마지막 시험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위험한 이들에게는 기회이자 절망의 기회이다.

그렇기에 그런 자리에 있는 이들은 최선을 다한다. 항상 열심히 달린다. 자칫 한번의 실수로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늘에 쏟은 공을 쫓는 외야수들처럼 우리 아버지 역시 항상 열심히 세상에서 달려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열심히 달렸을 것이다. 달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지금 놓쳤을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다음 수비를 위해 허리를 숙이고 저 멀리 홈 플레이트를 쳐다보는 일조차 그에게 힘겹다. 팀을 구하는 호수비 한번 못해보고 은퇴를 해야만 하는 아버지들. 그들에게는 시범경기가 없다. 



우리의 아버지에게는 시범경기가 없었다.

그 어려운 시절 학교를 졸업하고 혹은 졸업하지 못하고 세상에 마주했다. 세상이라는 경기에.

아버지는 경험도 없었고, 세상이 가지고 있는 노하우도 없다. 

열심히 살아서 사랑하는 것들을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감. 그리고 책임감. 또 성실함만 있을 것이다.

실수하면 끝이다. 지금 자존심 이거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게 본인을 죽이며, 벼랑 끝의 야구 경기에서 살아오셨다. 그렇기에 우리 아버지가 참 애처롭고 날 아프게 한다.


우리 아버지도 연습경기가 필요합니다. 

우리 아버지도 연습이 필요한, 아직 세상에 처음 나온 신인에 불과하다고요! 외쳐도 소용없다. 경기는 끝났다.


아버지의 지난 30-40년의 인생을 보았을 때, 나는 현재의 9회의 모습만으로 그를 바라본다.

1-8회까지 아버지는 얼마나 단단하고 무서운 세상이라는 투수, 타자에 맞서 힘겹게 버티며 살아왔을까.


...

...

...


아팠다.

그러나 7회 콜드게임으로 끝나지 않았던 

나의 아버지의 멋진 패기와 지독한 성실에 눈물과 함께 큰 박수를 보낸다.


멋졌습니다. 아버지. 참 잘 싸우고 버텨왔어요.




이 책은 우리의 인생을 야구와 빗대어 설명하고 있는 책이다. 그런 책이다.

나는 음 이 책이 나에게 준 감정을 나의 부족한 글로 설명 할 수 없다. 

그래서 내가 책을 읽으면서 함께 아파했고, 공감했으며, 힘들어했고, 울었던 몇 구절의 전문 혹은 일부를 

아래와 같이 작성했다.


혹여 내가 미래에 또 다시 이 글을 읽는다면, 혹은 누군가 이 글을 읽는다면,

아래의 글을 통하여 스스로를 위로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안아주고. 내 인생에게 칭찬해주길 바란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꼭 이렇게 외치길 바란다. '잘 해왔다.', '내가 잘 안다.'





해가 높이 떠 있을 때만 활약하는 투수가 있다. 그는 배팅볼 투수다. 

경기가 시작하기 전, 그는 자기 팀 타자의 컨디션을 높이기 위해 적당한 위치와 알맞은 속도로 공을 던진다. 

그의 손에서 놓인 공이 진행 방향을 급하게 틀어 경기장 바깥으로 뻗어나갈 때, 투수는 안도감을 느낄 것이다. 

그는 맞으면서 그의 일을 제대로 하고 있다. 나도 내 일을 제대로 하고 싶다. 




'지금'과 '이곳'이라는 환경에서 우리 대부분은 2군이거나 후보인 것 같다. 

하지만 우리에게 모든 순간은 빛나는 기회라 믿는다. 빛나는 순간을 기다리며 당신과 수다를 떤다.




경기가 시작된다. 책이 시작된다. 시가 시작된다. 삶이 시작된다. 시작은 되는 것이 아니야. 하는 것이지.




전봇대에 올라가서 일하신 할아버지를 추억하며 작가가 적은 글


혼자서 밖에 나가, 더 젊을 적 당신이 매달려 있었던 하늘에 공을 던지고 받았다. 

하늘은 던진 공을 어김없이 내게로 돌려주었다. 나는 당신에게 무엇인가를 돌려줄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곳에서도 당신은 전봇대에 몸을 의지한 채 하늘에 매달려 계신가.




세상 앞에 당신은 혼자가 아니므로: 벤치클리어링


벤치클리어링이란 그런 것이다. 벤치를 깨끗이 비우기에 벤치클리어링이다. 

뭔가 미묘한 분위기가 감지되면 더그아웃에서 불펜까지 우리 팀원을 위해 현장으로 달려나가는 것이다. 

이때 튀어나온 속도로 그 팀의 순위를 가늠할 수가 있다. 잘나가는 팀은, 당연히 팀워크도 좋다.

다만 나가서 다짜고자 주먹질하고 싸우지 않는다. 그들은 그라운드에서 만나 안부를 주고 받거나, 형한테 이러지 마라, 살살 해라, 혹은 오늘 너무 심한거 아냐? 등의 말을 나누고 다시 자리로 돌아갈 것이다. 


그들은 팀이라는 조직 속에서 몸과 몸으로 연대하고 있다. 

그러니 팀원의 편에 서서 상대편과 맞서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벤치클리어링은 경기의 일부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일은, 우리 팀의 동료들이 나를 위해 다이아몬드 복판으로 나와주었다는 것.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는, 다이아몬드처럼 깨지지 않을 약속.


생각해본다. 

내가 만약 세상이라는 투수가 던지는 강속구에 맞서는 타자가 되었을 때, 누가 나를 위로해주지?

나를 위해 그라운드로 벼락 같이 달려올 동료는 누구지? 친구들의 얼굴을 떠올려본다.


하지만 당신이 세상에 둘러싸여 대거리를 주고받을 때, 내가 자리를 박차고 달려나갈께. 어깨를 걸칠께. 

당신은 나와 마찬가지로 정직하게 살아왔고, 우리 모두는 그걸 잘 안다. 나는 당신의 편이다. 당신은 어떤가. 

어디든 마음으로 혹은 정신으로 끝내는 몸으로. 우리는 같은 편.

광포한 무리들에 맞선 지금, 우리는 벤치클러어링 하러 간다.


당신과 나의 동해바다 같은 오지랖으로 펼쳐진 위아래 없는 연대의식. 

이를 줄여서 '벤치클리어링'이라고 부른다.




멋있는 건 멋있게 인정하기


초등학교 6학년 아이들의 야구를 보며, 생각한다.

아이들은 알고 있다. 볼과 스트라이크를 위한 '목소리 크기 대결'보다 다음 공을 던지며 계속해나가는 

'야구 대결'이 훨씬 재미있음을. 그리고 우리를 갸우뚱하게 만든 방금 그 공이 사실 멋진 유인구이거나 승부구였음을. 비슷한 타이밍은 비슷하게 아웃이다. 

어쩌다 나오는 멋지고 진귀한 플레이를 아이들은 사랑했다. 아름다운 모든 것은 진지한 사랑을 받아 마땅하므로. 멋진 일은 멋지게 인정할 것.




허리를 숙여 나누기


초등학교 6학년 나눔의 정석은 글러브다. 야구를 하기 위해 친구 9명 모두 글러브를 가지고 있을리가 없다. 

많은 친구들은 당연한 거 아니냐는 표정으로 맨손으로 야구를 하러 와서 무리에 낀다. 

글러브를 가진 친구는 글러브를 가지지 못한 친구와 어울려 야구를 한다.

숫자가 맞아야 야구를 할 수 있고 또 그편이 재미있으니까.

아이들은 손바닥에서 난 땀으로 안감이 촉촉하게 젖은 글러브를 서로 나누어 낀다. 

그것은 함께 시합하는 다른 편과도 마찬가지이다. 글로브를 모으고 또 모아서 가까스로 9개를 맞추는 것.

그래서 그 글러브로 함께 야구를 하는 것. 그것이 자시닝 글러브의 주인이라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일이다. 


공수교대 시간이면 허리를 숙여 자기가 수비를 봤던 그 자리에 글러브를 놓고 뛰어 들어온다. 

그리고 뛰어나간 상대편이 다시 그 글러브를 낀다. 없으면 나누어 쓰고, 있으면 그 역시 나누어 쓴다. 




네멋대로 꿈꾸기


초등학교 6학년 아이들은 꿈을 꾼다. 아이들은 너도 나도 장종훈이 되었다. 

날아오는 테니스공에 방망이를 휘둘렀다. 모둔 장종훈이 되지는 못한 것 같다. 

하지만 그 비슷한 것이 되려고 우리는 아직까지 연습중임을 믿는다. 물집이 잡히고 터지기를 반복해서 거북 등껍데기가 된 장종훈의 손바닥처럼, 그때의 아이들은 지금까지도 더욱, 연해지고 강해지기를 반복하고 있다. 

네멋대로' 꿈꾸기를 위한 물집이라면 다시 잡히고 다시 터질 것이다.




그렇게 쉽게 죽지 않아: 파울


두 번까지는 스트라이크 카운트라는 벌칙을 받고, 세 번부터는 무한대로 칠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는 이상한 규칙. 야구에서의 파울은 기회의 영속성을 의미한다. 

대부분 방망이에 제대로 맞히지 못한 타구이지만 그것이 규격 바깥으로 나가버렸으므로, 타자는 한번만 더, 

다시 한번 더 기회를 갖는다. 당신이 살거나, 죽을 떄까지.


살면서 결정적 기회는 단 세번 온다고 했던가, 하지만 무엇이든 세 번은 너무 적다. 

우리는 분명히 훈련 받은 대로, 혹은 본능적으로 그것을 쳤고, 운이 좋지 않았는지 아님, 신이 외면했는지 제대로 치지는 못했다. 하지만 잡히지도 않았잖아? 너무 빡빡하게 굴지 말자. 


타석에서 잠깐 벗어나 심호흡을 하자. 아직까진 파울이니까 괜찮아. 자포자기로 허리를 숙여 스리번트 대지말고. 가운데로 들어오는 공은 끝내 가만두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을 갖자. 


파울은 그 마음가짐이 만들어낸 또 다른 기회다. 우리의 시간은 아직 마지막이라는 글러브에 들어가지 않았다. "당신도 나도 아직 죽지 않았어. 그러니까 힘내" 이런 말을 줄여서 파울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열심히 산다고 해서 모든 일이 잘 풀리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삶과 여전히 투쟁중이다. 

수많은 청춘들이 삶의 드래프트, 그 현장에서 묵묵하고 뜨거운 이닝을 함께 버티고 있다. 

그 이닝의 끝에 있을 '역전만루홈런'을 기대한다.




여기, 부드러운 한 남자가 있다: 번트


스퀴즈는 꽉 쥐다. 쑤셔넣다. 압착하다 등의 뜻이다. 그는 모든 상처와 트라우마와 콤플렉스를 쥐어짰고 마침내 성공했다. 그것은 단순한 희생번트가 아닌, 스퀴즈 번트였다. 사내는 그렇게 번트 전문가가 되었다. 

하위 타선의 견실한 선수로 알려진 그는 번트 성공률이 90%에 육박한다. 그는 희생의 달인이자 번트의 귀재다. 가장 중요한 순간에 그는 허리를 숙이고 무릎을 굽힐 줄 안다. 사내는 거포도 아니고, 정교한 타자도 아니다.

 그는 쉽게 떨지 않는 강심장이 되었다. 강심장은 번트를 잘 댄다. 그는 강하기 때문이다.


상처를 딛고 일어서는 사람은 강하다. 그런 사람은 자신을 희생시킬 줄 안다. 

대부분의 번트는 희생을 전제로 행해진다. 번트는 고귀하다. 

자신을 완벽하게 죽여야만 살려야 할 주자를 완벽하게 살릴 수 있다. 어설프게 자신도 살려고 하면 실패하기 십상이다. 번트를 성공한 선수에게 더그아웃의 선수들은 하이파이브를 청한다. 


희생을 강요할 수 없는 것이지만, 야구에서는 희생을 강요받는 선수들이 있다. 그들은 강한 사내들이다.

희생을 아는 남자니까. 번트는 공을 달래야 한다. 자신을 숙여야 한다. 주자를 살려야 한다. 

파울라인을 살펴야 한다. 주위를 배려해야 한다. 조용하면서 굳건한 신념이 있어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아껴야 한다. 세상을 두루두루 살펴야 한다. 그걸 줄여서 '번트' 라고 한다.




우리는 성급한 억울함으로 폭투를 던지기도 할 것이다. 우리는 짜증과 울분으로 악송구를 던질 것이다.

과장된 포즈와 욕망으로 헛스윙을 할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오래된 정성으로 갈고 다듬어진 시간 속에서 존재함을 난 믿는다.




야구는 언젠가 끝나게 마련이다. 끝나는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지만 그래도 끝난다. 그리고 다시 시작한다. 

당신과 나의 시간은 언제까지일까.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끝과 시작은 맞물려 있고 지금이 지나면 다음의 지금과 인사를 나누어야 한다. 안녕? 안녕.




언제나 중요한 사실은 우리는 드디어 한 경기를 이겼고,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지는 날이 이기는 날보다 많겟지만, 뭐 어떤가. 우리의 팀 케미스트리는 루저라는 이름으로 끈적끈적 매여 있다.




나의 빛나는 더러움: 런다운


어쨌거나 그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 

(여기는 나의 설명: 런다운은 3루와 홈 사이에서 주자가 왔다 갔다 하지만, 3루수 및 포수에게 막혀서 길을 잃었을 때를 말한다. 주자는 쉽게 잡힐 수도 있지만, 끝까지 홈을 향해 질주한다. 

그리고 몸이 터치될 것을 알지만 몸을 이리 저리 비꼬고, 슬라이딩을 해서 홈 베이스 밟으려고 노력한다. 

어짜피 잡힐 줄 알면서도 말이다.)


그저 그런 날 우리는 야구장에서 그가 넘어지는 꼴을 보고 그의 이름을 연호한다.

 일상의 틈바구니에 런다운되어 발버둥치는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부르고, 노래를 부르고, 서로를 부른다.

그의 유니폼은 더러워졌다. 그 더러움은 그가 그저 그런 선수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윽하게 방증한다.


어쨌거나 우리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저 그런 새벽의 시간은 밤과 아침 사이에 나를 가둬놓고 내 몸을 공격해왔다.

피곤에 지친 나는 런다운에 걸린 채로 어디 도망도 가지 못하고, 베이스라인의 중간쯤에서 선 채로 졸곤 했다. 밤에서 아침으로 슬라이딩하면서 나는 꼭 아웃당하는 기분이었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저 그런 일로는 그저 그런 대학의 등록금 내기도 빠듯했다. 더러워진, 내가 입은 유니폼이 나를 결정했다.


 하지만 그 얼룩들은 이상하게 반짝반짝 빛이 났다. 어쨌거나 내가 최선을 다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죽지 않고 태그를 피해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최선을 다해 움직이는 동작은 반짝이게 마련이다. 

유니폼은 더러워지겠지만, 뭐 어떤가. 그런 반짝반짝한 더러움을 '런다운'이라고 한다.






정리하고 추천하며. 

우리의 인생은 예측불가능 할 것이다. 언제나 계획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계획되로 된 일을 찾아봐라! 없다.)


그럼에도 스스로를 위로하며. 기다리자.

불펜 투수가 1이닝을 책임지기 위해, 혹은 1명의 타자를 상대하기 위해 하루 종일 몸을 푸는 것처럼.

당신에게도 언젠가 당신의 계획을 실현시킬 그 순간이 올 것이다.


그때까지 몸을 잘 풀자. 다치지 말자. 컨디션 조절 잘하다.

그 후에 그라운드에 나가는 거다.


내가 어떤 제목인지 어떤 달란트를 가지고 있을지 어떤 크기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거나 우리는 목표를 위해(나에게 맞겨힌 1명 혹은 2명의 타자. 혹은 1이닝 혹은 2이닝) 그라운드를 밟을 것이다.


그때까지만 잘 좀 버텨라. 제발 아프지 말고. 자책하지 말고.



그리고 기억할 것.

기다림에 순간은 길지만, 애석하게 빛나는 순간은 아주 짧을 것이라는 것을.


하지만 그 짧은 빛나는 순간에 희열을 느끼고 그 맛을 보려고 버티고 굳세게 지금도 살아가지 않냐.

빛날 짧은 순간. 그 동안 아픔 서러움 역시 사라질 것이다. 


건투하길. 나의 인생 그리고 당신의 인생.

아름답길. 나의 인생 그리고 당신의 인생.

행복하길. 나의 인생 그리고 당신의 인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