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주의의 시각으로 본 글로벌판 '지대넓얕':


이 책을 다 읽은 것이 벌써 석 달 전이다. 사람들은 이 책에 대해 '총, 균, 쇠의 뒤를 잇는 거시사의 대표작'이라고 하면서, 선사시대 및 고대에 대한 내용 (인지혁명과 농업혁명) 그리고 특히 미래 예측에 대한 내용 (인공지능, 사피엔스의 종말)에 주목하고 있다. 얼마 전 저자가 방한했을 때도 언론은 최근의 알파고/인공지능 열풍과 관련하여 미래에 대한 질문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이 책의 핵심은 전체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중간 부분, 즉 정치(제국/민주주의), 경제(화폐경제/자본주의), 그리고 종교의 3대 '상상의 질서'를 가지고 고대-중세-근대에 이르는 역사를 설명하는 부분이었다. 인간이 인지 혁명을 겪으면서 (언어를 통해) 허구와 상상의 질서를 만드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는 명제를 발전시켜 정치, 경제, 종교라는 세 가지의 신화적 존재를 상대주의적 시각으로 거침없이 '난도질'하고 있다. 반면 언론에 주로 나오는 미래에 대한 부분은 분량이 적을 뿐더러 저자도 논의를 굉장히 조심스럽게 진행하고 있다. 내가 읽기도 영 힘들었고.


민족(혹은 국가, Nation)이 상상의 공동체라는 베네딕트 앤더슨의 주장도 굉장히 거부감이 심한데, 민족-국가 뿐 아니라 경제(자본주의)는 물론 종교까지도 상상의 산물이라는 저자의 주장이 독자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지는 듯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두 가지 측면이 있는 듯하다. 첫째는 물 흐르는 듯 유려하게 지나가는 저자의 말빨이 독자로 하여금 반론의 기회를 놓치게 만든다. 둘째, 이 책이 미래를 예측한 책으로 (잘못, 혹은 의도적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현재의 여러 문제를 분석한 부분에 대한 비판적 독서는 생략하고 지나갈 수도 있다.


어쨌든, 이 책의 본령은 정치, 경제, 종교가 모두 상상의 질서라는 기본 명제를 통해 방대한 세계사와 함께 (물론 서양 중심이라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현재 우리 사회에 등장하는 각종 주요 개념들 (제국/국가, 자유민주주의, 자본주의, 기독교, 과학기술 등)을 비판적으로 정리, 해석한 데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것 때문에 이 책이 전세계적으로 인기를 끈 것이리라. 다시 말하면, 이 책은 작년 우리나라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지대넓얕'의 글로벌판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제 이 책을 다시 처음부터 훑으며, 특히 인상적인 부분, 그리고 뭔가 내가 덧붙일 말이 있는 부분을 찾아 한 번 정리해 본다.


이 책을 관통하는 '상상의 질서' 내지 '허구에 대한 집단적 상상'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언어이고, 인지혁명이란 바로 지금으로부터 7만~3만 년 전 이 언어가 탄생한 사건을 의미한다. 언어를 이용하여 '상상의 질서' 또는 '가상의 실재'를 마음대로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에 인류는 짧은 시간 안에 다양한 행동 패턴을 나타내었고, 이것이 결국 역사로 연결되었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1장 1절이 떠오른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인지혁명의 3대 산물 중 하나가 종교이니까, 딱딱 맞아 떨어진다. 다만, 이 책은 대체 언어가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대해서는 말을 아낀다. 사실 아무도 잘 모른다. 그리고, 언어가 만들어 내는 이 '다양한 행동 패턴'을 강조하면서 저자는 역사가 '반드시 진보한다'라든가 '점점 퇴보한다'는 단방향적인 해석에 대한 거부감을 내비친다.


저자는 농경시대 이전의 수렵채집 사회를 '최초의 풍요사회'라고 이름짓고 있는 전문가들의 견해를 소개한다. 수렵채집인들은 오늘날의 사람들에 비해 넓고 깊고 다양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노동 시간도 훨씬 적었으며, 영양 상태도 좋을 뿐더러 전염병도 적은 등, 많은 측면에서 '더 나은' 생활을 영위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괴베클리 테페'와 같은 거대한 기념물을 세우기도 했다. 농경혁명과 과학(산업) 혁명이라는 두 가지의 큰 변화를 겪은 현 인류가 과거 수렵채집 시대의 인류보다 나을 게 없다는 이러한 판단은 곧 다가올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예상하는 '로봇 혁명' '인공지능 혁명' 등이 우리의 삶을 더 힘들게 만들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솔직히 저자가 책 말미에 이런 내용을 좀 더 자세히 전개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그런 내 기대는 충족되지 않았다. 최근 '로봇/인공지능 혁명'이 인류에게 가져올 변화에 대해 '특이점'부터 '기술 봉건주의'까지 정말 다양한 의견들이 나오고 있다. 나는 그냥 '가능성의 지평을 넓게 열어 두고' 담담하게 기다릴 뿐이다.


호모 사피엔스가 과학(산업) 혁명과 농업 혁명만이 아닌 인지 혁명-수렵 채집인 시대에도 많은 동물과 식물을 멸종시켰다는 지적도 인상적이었다. '우리 조상들이 자연과 더불어 조화롭게 살았다는 급진적 환경보호운동가의 말은 믿지 마라'고 저자는 말한다. 흔히들 유럽인이 '신대륙을 발견' 하면서 아메리카 대륙과 호주의 자연이 많이 훼손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거기 살고 있던 원주민들도 이미 정착 과정에서 그곳의 자연을 대규모로 파괴했던 것이다. '어차피 인류의 존재 자체가 자연 파괴를 가져오는 것 아닌가'하고 냉소적으로 접근할 수도 있지만, 저자는 '그러니까 아직 살아남은 동식물 종들을 더 적극적으로 보호해야 한다'고 '건전한' 주장을 편다.


농업 혁명을 '거대한 사기'라고 규정한 대목도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농업 혁명-식량 생산성 제고에 힘입어 우리 종(사피엔스)이 DNA의 복사본 개수(즉 인구)를 폭발적으로 늘린, 즉 '진화적으로 성공'한 사건이 개개인의 큰 고통과 나란히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여기서, 나는 다시 '로봇/인공지능 혁명'에 대해 질문을 한 번 던져 본다. '로봇/인공지능 혁명'은 과연 그 전에 진행된 인지혁명, 농업혁명, 과학혁명과 마찬가지로 인류의 '진화적 성공'을 더 가속화시킬 것인가? 아니면, 오히려 과학혁명 후기라 할 수 있는 현재 일부 선진국에서 나타나고 있는 인구 감소 현상을 촉진시켜 '진화적 퇴보'를 가져올 것인가? 생산성의 '폭발적' 증가가 인류 노동 시간의 감소, 나아가서 인구 자체의 감소로 이어질 것이라는 성균관대 김범준 교수의 최근 조선일보 칼럼도 생각난다. 만약 이렇게 된다면 인류는 인지혁명 직후의 수렵채집사회-'최초의 풍요사회'로 회귀하는 듯한 모습을 보일 지도 모르겠다. 다만, 이렇게 될 경우 21세기 말쯤 전 세계 인구의 거의 절반을 넘게 차지할 아프리카인들의 공격을 받지나 않을까? 마치 농업 혁명으로 폭발적으로 늘어난 농민들이 수렵 채집인들을 압도했듯이. '가능성의 지평을 열어 두자'는 결론은 여기에도 적용된다.


여기서 저자는 갑자기 함무라비 법전과 미국 독립선언문을 비교하면서,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인 '평등 사상'에 내재한 신화적 요소를 지적한다. 생물학적인 진화는 평등이 아닌 차이에 기반을 두며, 평등사상은 기독교 신앙의 창조사상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함무라비 법전의 신분에 따른 차별과 미국 독립선언문의 평등 사상 모두 사회를 유지 발전시키기 위한 '상상의 질서'라는 주장, 그리고 이 '상상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특히 엘리트층이 이를 진정으로 신봉해야 한다는 주장에서 나는 저자가 가지고 있는 지식인 특유의 냉소주의를 읽는다. 하지만 '상상의 질서를 빠져나갈 방법은 없다'니, 저자와 냉소적인 '코드'를 공유한 나 같은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 자신 개인적으로 '다양한 행동 패턴'을 개발하여 적응할 수밖에. 정치(국가), 경제(회사), 종교(기독교)라는 각각의 '상상의 질서'를 신봉했다가 벗어났다가 하는 패턴을 반복하면서.


저자는 더 나아가, '대규모 사회 치고 차별을 전부 없앤 곳은 이제까지 없었다'면서 사회경제적 지위에 따라 교육의 기회가 달라지고 결국 능력도 달라지게 마련이라는 상당히 '교육사회학'적인 명제도 제시한다. 카스트, 미국 인종 차별 등의 예를 들어 '우연한 역사적 사건이 견고한 사회 구조로 변한다'고 주장한 대목은 '상상의 질서'가 가지는 어두운 측면이리라. 이러한 악순환을 어떻게 끊어낼 것인지에 대해 저자는 아무런 조언을 해 주지 않는다.


저자의 주장은 남녀 성(젠더)차별 역시 생물학적 근거가 박약한 상상의 질서라는 데서 절정을 이룬다. 농업혁명 이후 세계 보편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남성의 지배가 근력, 공격성 등의 생물학적 차이나 여성이 담당하는 임신-양육 기간이 길기 때문에 남성에게 순종하게 되었다는 진화생물학적 요소로는 설명이 잘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만, 여기서 저자는 최근의 성차별 완화 및 성소수자 인권 향상에 대해 혼란스러울 정도로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근거 없는 신화에 기반한, 보편적이고 안정적인 상상의 질서'가 성차별만 있는 것은 아닐 텐데, 왜 유독 성차별의 지속성에만 의문을 가지고 성평등 향상에 대해 '애정어린' 눈길을 보내는 것일까? 여기서 나는 저자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상기한다. 자신이 닥친 문제에 대해서는 '상상의 질서'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것 역시 '다양한 행동 패턴'의 하나로 보면 되겠지.


이제 본격적으로 3대 '상상의 질서'인 경제, 정치, 종교를 분석하기에 앞서, 저자는 인류 문화의 일반적인 몇 가지 특징을 제시한다. 우선, 모든 문화에는 모순되는 측면, 즉 '인지부조화'적 측면이 있으며, 이는 문화 자체를 유지 발전시키는 핵심적 요소라는 것이다. 그 예로 저자는 중세 유럽의 기독교와 기사도, 현대 정치의 자유와 평등을 제시한다. 인류의 역사는 작고 단순한 문화가 뭉쳐 크고 복잡한 문명으로 변하는 '통합'의 방향으로 움직여 왔다고도 한다. 세계가 기원전 천 년 경부터 경제(화폐), 정치(제국), 종교(보편종교)의 세 가지 보편적 질서로 통합되어 왔다고 저자는 정리한다. 모순이 문화 발전을 낳는다는 생각이야 너무나 상식적인 것이고, 인류 문화의 보편적 질서 역시 충분히 수긍할 수 있다.


화폐는 '순수한 정신적 혁명'이요 '인간이 고안한 여러 시스템 중 가장 보편적이고 효율적인 상호신뢰 시스템'이라고 저자는 정의한다. 국경과 문화를 초월하는 단일 화폐권역의 등장이 지구를 단일 경제권역으로 통합하는 기초를 낳았다고도 평가한다. '돈은 인류가 지닌 관용성의 정점이며 인간이 창조한 신뢰 시스템 중 거의 모든 문화적 간극을 메울 수 있다.'는 발언은 거의 '돈의 재발견'과 같이 느껴진다. '돈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명제를 좀 더 멋있게 말한 것이랄까. '서로의 신앙에 동의할 수 없는 기독교인과 무슬림은 돈에 대한 믿음에는 동의할 수 있었다'는 표현은 무릎을 탁 치게 만든다. 화폐는 신뢰의 산물이요 대표적인 '상상의 질서'이기 때문에 '유형의 재화 생산'을 기본으로 하는 경제학이 완벽히 분석하기 어렵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해 본다.


제국은 '문화적 다양성'과 '영토의 탄력성'을 지닌 정치 질서라고 저자는 정의한다. 군사적 정복의 유무나 독재 정치 여부, 영토나 인구의 크기로 정의해서는 안 된다고도 한다. 저자는 특히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제국'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감을 비판하며, 제국이라는 정치 체제를 객관적으로 볼 것을 주장한다. '제국은 매우 안정된 형태의 정부다' '하나의 제국이 무너진다고 해서 피지배 민족들이 독립하는 일은 드물었다' '제국의 유산을 모두 거부한다는 것은 인류문화의 대부분을 거부하는 것이다' '과거를 극단적으로 단순화해서 선인과 악당으로 나누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견해들, 불편하게 느끼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나는 다 동의한다. '제국주의의 유산을 청산하자'는 논의가 다 부질없다는, 어차피 그 이전의 문화들도 제국의 산물이기는 마찬가지라는 주장도 일리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일제 잔재의 청산'을 주장하지만, 그 이전에 존재했던 문화유산의 대부분은 '중국 제국'의 산물이 아니었는가. 맞다. 딱 '식민지 근대화론'을 긍정하는 말이다. 아직은 이 문제를 가지고 '사피엔스'를 비판하는 사람을 본 적은 없지만.


저자는 '세계 단일 제국'에 대한 얘기를 슬쩍 던져 본다. '국가들은 빠른 속도로 독립성을 잃고 있고, 어느 국가도 독자적으로 경제정책을 실행하거나 마음대로 전쟁을 선포하고 수행할 실질적 능력이 없다'는 이 주장은 분명 잘 생각해 봐야 할 화두이다. 물론, 경제 정책의 자율성 약화나 주요국간의 전쟁의 부재만 가지고 단일 제국을 논하는 것은 너무 성급하다. 하지만, 이 '세계화' 시대의 끝이 과연 어디일지를 예측해 보는 것은 분명 의미가 있다. 과거에 모든 길이 로마로 통했듯이, 이제는 정보기술을 하는 사람은 모두 실리콘 밸리로 가려고 하지 않는가. '로봇/인공지능 혁명'은 '세계 단일 제국 형성'으로 가는 디딤돌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다음은 종교 차례이다. 종교는 '초인적 질서에 대한 믿음을 기반으로 하는 인간의 규범과 가치체계'이며 '보편적이고 선교적'이어야 한다고 그는 정의를 내린다. 그리고 그는 흔히들 가지고 있는 '일신교가 다신교보다 고등 종교'라는 고정관념을 깨뜨린다. 다신교는 '완벽하게 무심한 최고 권력과 편견을 지닌 수많은 하위 권력들을 동시에 믿기 때문에' 폭넓은 종교적 관용을 낳는다고 주장한다. 반면 일신교는 말로는 '사랑과 관용의 종교'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수많은 사람들을 살해하였다. 로마인들이 살해한 기독교인은 몇천 명을 넘지 않았던 반면, 기독교인들은 자기들끼리 수백만 명을 학살했던 것이 맞다. 일신교인 기독교 안에 다신교(성인), 이신교(악마)가 있으며, 특히 '인간에게는 모순을 믿는 놀라운 능력이 있기 때문에' 이신론적 신념이 일신교 안에 들어가 있다는 지적이 인상적이었다. 초인적 질서가 신의 의지가 아니라 자연법칙의 소산이라고 믿는 '자연법칙 종교'인 불교 역시 일신론, 이신론, 다신론적 요소를 받아들여 다른 세계 종교와 마찬가지로 '제설 혼합주의'적인 형태를 가지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저자는 이데올로기를 자연법칙 종교로 끌어들이는 대담한 시도를 한다. '초인적 질서'가 꼭 '신의 존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이야기다. 자본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공산주의), 국가사회주의(나치)가 다 일종의 종교로 간주된다. 저자는 여기서 자유주의, 사회주의, 국가사회주의를 모두 호모 사피엔스를 숭배하는 '인본주의적 종교'로 분류한다. 자유를 강조하는 자유주의, 평등을 강조하는 사회주의가 모두 기독교 일신론의 토대 위에 성립되었다는 주장은 이미 우리에게 친숙하다. 반면, 전통적 일신론의 속박에서 벗어난 유일한 인본주의가 진화론적 인본주의이며 그 대표적 사례가 국가사회주의라는 주장은 이 책에서 가장 획기적이고 논쟁적인 부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치는 인류를 보편적이고 영원한 존재가 아니라 진화하는 존재로 보았으며, 인류의 퇴화를 막고 '초인'으로의 진보적 진화를 목표로 했다는 것이다. '나치가 자유주의, 공산주의와 싸운 것은 이 두 '종교'가 인류의 진화를 방해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치는 인간을 혐오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인간을 찬양하며 인류의 위대한 잠재력을 믿었다'는 주장에서는 소름이 끼치기까지 한다. 유대인인 저자는 지금 나치즘에 '보편적 사상/종교'로서의 '시민권'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자유주의적 인본주의 신조와 생명과학의 최근 발전(배아복제 등) 사이에 엄청난 간극이 벌어지고 있는 것도 분명 사실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진화론적 인본주의를 ('나치즘'의 독성 요소를 최소화하면서) 다시 도입해야 할까? 아니면, 전통적인 '인본주의적 종교'를 버리고 또다른 '자연법칙 종교'인 불교를 새로운 시대의 종교로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야 할까? 황우석 교수의 줄기세포 연구를 불교계에서 적극 후원했던 사실이 떠오른다. (물론 줄기세포 등 여러 현대 생물학 연구를 구체적으로 뒷받침하는 새로운 불교 사상이 나왔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없다.) 그리고 저자는 지금 남방불교 명상인 위파사나에 심취해 있다고 한다.


저자는 이제 그가 가지고 있는 역사상대주의를 다시 한 번 정리한다. '특정한 역사 시대에 대해 많이 알수록 왜 하필 일이 그런 식으로 전개되었는지를 설명하기가 더 어려워진다' '그 시대를 가장 잘 아는 사람들, 즉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이야말로 그 시대를 가장 모르는 사람들이다' '역사는 스스로에 대한 예측에 반응하는 2단계 카오스이며 결정론으로 설명될 수도 예측될 수도 없다' '역사가 결정론적이지 않다고 믿는 것은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믿는 민족주의, 자본주의, 인권(자유민주주의)이 우연에 불과하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역사는 인류의 복지-개별 유기체의 행복에 무관심하다' '역사는 무수히 많은 가능성들이 있는 드넓은 지평을 가지고 있으며, 그 중 대부분은 영영 실현되지 않는다' 하나하나 비수로 찌르는 것 같은 말들이다. 그리하여, 저자는 '역사를 연구하는 것은 미래를 예측하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 앞에 많은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다'라고 결론을 내린다. 역사 연구는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놀라지 않기 위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불교적 상대주의의 색채가 강하게 드러나는 듯하다. 허무하다고? 어차피 내가 책을 읽는 가장 큰 이유는 그냥 '지적 호기심 충족'이 아니던가. 역사 연구도 마찬가지겠지. 그러고 보니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말이 유행하는 우리나라에서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것이 참으로 신기하다.


이제 '3대 혁명'의 마지막인 '과학혁명'을 분석할 차례이다. 일단 과학혁명은 '무지의 혁명' 즉 가장 중요한 질문에 대한 해답을 모른다는 발견에서 시작된 혁명이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과학과 기술이 관련을 맺은 것은 자본주의 체제와 산업혁명이 등장한 19세기부터라는 점, '인류가 진보한다'는 생각 역시 과학혁명의 산물이라는 점도 지적한다. 결국 저자가 주장하는 핵심 명제는 과학혁명이 과학과 제국과 경제, 세 요소 사이 되먹임 고리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정치와 경제로부터 독립된 과학'이란 있을 수 없다는 얘기다. 그리고 '유럽이 세계를 지배하게 된' 이유는 바로 이 과학혁명이 유럽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과학혁명이 여러 제국 중 유럽 제국에서 발생한 이유로, 저자는 둘 다 '무지를 인정'했다는 점을 들고 있다. 유럽 제국이 주도한 '지리상의 발견'이 '새로운 영토와 새로운 지식을 획득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증거로 저자는 전체의 절반이 텅 빈 16세기의 세계 지도를 제시한다. (사실 이 '무지의 인정'은 '신대륙'에 대한 폭력적인 정복을 낳기도 했다. 무식하면 용감한 법이랄까.) 과학이 가지고 있는 '진보'라는 이미지가 제국의 확장에 이데올로기적 정당성을 제공했다는 점도 지적한다. (이러한 설명이 불충분하다는 비판이 여기저기서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저자는 '역사에 결정론적 설명은 적절하지 않다'는 역사상대주의를 내세우며 빠져나갈 게 뻔하다.)


이제 자본주의 순서이다. 경제학을 공부한 사람으로서, 나는 자본주의의 정의를 내린 이 부분이 '사피엔스'에서 최고의 하이라이트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이미 앞에서 자본주의를 종교의 일종으로 분류하였다. 자본주의가 믿는 '초인적 질서'는 바로 경제 성장이 영원히 계속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경제의 핵심 기제인 신용(자금의 대차 혹은 주식 투자)도 바로 '내일이 오늘보다 낫다는 믿음' 즉 성장을 기반으로 한다. (성장이 없을 때 신용은 고리대금의 형태로만 존재하였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제1계율(규범)은 '생산에 따른 이윤은 생산 증대를 위해 재투자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장(생산 증대)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재투자가 가능하며 (성장이 없다면 부자는 이익을 그냥 소비한다), 또 이러한 재투자가 성장을 가능하게 한다. '영원한 성장'이라는 자본주의의 기본 신념은 우주에 대해 우리가 아는 거의 모든 지식에 위배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며, 사실 이는 경제학의 기본 원칙 (수확체감에 의한 균형점 접근)에도 위배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모순을 해결한 것이 바로 과학혁명이었다.


유럽의 제국주의 발전을 가능하게 한 핵심 기제도 바로 자본주의의 신용시스템이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그 유명한 네덜란드와 영국의 동인도회사 이야기가 우선 등장하고, 아편 전쟁이나 그리스 독립 전쟁도 투자자/채권자들의 이득을 위한 것이었다고 해석한다.


자본주의 교리 중 '가장 흔하고 영향력 있는 변종'이 바로 자유시장 교리(자유방임주의)이지만, 모든 정치적 편견에서 자유로운 시장 같은 것은 원래 없는 법이라고 저자는 일갈한다. 자유시장 자본주의는 또한 이윤이 공정한 방식으로 얻어지거나 분배되는 것을 보장하지 않으며, 그 좋은 예가 16-19세기 유럽이 주도한 대서양 노예무역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자본주의가 불평등을 촉진시킨다는 비난에 대한 자본주의의 반론은 '대안이 없다(공산주의는 실패했다)' 그리고 '조금만 더 참으면 좋아진다'는 것 두 가지이지만, 저자는 은연중에 자본주의를 '거대한 사기'라는 농업혁명에 비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스럽다.


여기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최근 대두되고 있는 저성장에 대한 우려를 떠올리게 된다. 성장이 없다면 이윤의 재투자도 무의미하고, 신용에 있어서의 금리도 아마 정치 권력에 대한 믿음을 기반으로 한 국채의 제로(혹은 마이너스) 금리와 일반 중소기업 및 개인을 대상으로 한 '고리대금'으로 나누어질지 모른다. 피케티의 '21세기 자본'도 저성장 국면에서 소득 분배가 악화된다는 주장을 핵심으로 하고 있다. 도대체 '제2의 기계시대' '제4의 산업혁명' 시대에 왜 저성장을 걱정하고 있어야 하느냐는 기본적인 질문으로 다시 돌아온다. 어쨌든, 성장이 없으면 자본주의에 큰 탈이 나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산업혁명은 무엇보다 '제2의 농업혁명'이었다는 것, 즉 기계화된 농산물 재배와 산업적 가축 사육으로 농업에 묶여 있었던 노동력이 제조업, 서비스업 쪽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는 것도 지적한다.


성장이라는 믿음을 이루기 위한 자본주의의 제1규범이 이윤의(재)투자라면, 제2규범은 소비지상주의이다. 부자(자본가)는 번 돈의 일부를 항상 재투자해야 하는 반면, 나머지 사람들은 번 돈에 빚까지 더해서 써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저자는 '자본주의야말로 그 신자 대부분이 규범을 성공적으로 준수하며 살아가는 역사상 최초(이며 아마 유일한) 종교라고 주장한다. 아무리 봐도 객관적이라기보다는 비꼬는 표현이다. 저자는 자본주의에 불만이 많다. 현재의 저성장 국면이 지속되었을 때 자본주의는 과연 어떤 모습을 보일 것인가. '로봇/인공지능 혁명'은 자본주의를 연장 발전시킬 또다른 과학혁명의 구실을 할 우 있을 것인가. 역시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고 기다릴 뿐이다.


산업혁명이 가족과 공동체의 전통적 기능을 국가와 시장으로 넘겼다는 주장은 우리에게 대단히 친숙하다. 개인은 국가와 시장 덕분에 가족과 공동체로부터 '해방'되어 더 강력한 존재가 되었지만, 또 이는 가족과 공동체로부터의 '소외'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러한 소외를 치유하기 위해 국가와 시장은 각각 국민과 소비 공동체라는 상상의 공동체를 만들었다. '종교'로 본다면 민족주의와 (자본주의의 제2규범인) 소비지상주의이다. 결국 민족주의도 종교라는 이야기인데, 저자는 민족주의가 죽음에 핵심적인 역할을 부여하는 유일한 종교(이데올로기)로 남았다고 평가한다. ('민족을 위한 죽음'을 예찬하고, '민족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살아남을 것'이라고 주장한다는, 즉 '순교'가 가능하다는 얘기다.)


저자는 갑자기 '행복론'으로 주제를 돌린다. 행복이 쾌락적, 생화학적 감각을 느끼는 데 기반을 두고 있다면 과학을 이용하여 우리 몸의 생화학적 시스템을 개조하면 될 것이다. 행복이 삶의 의미를 느끼는데 기반을 두고 있다면 집단적 환상, 즉 종교(인본주의, 민족주의 등)로 자신을 '기만'하면 될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불교적인 관점에서, 진정한 행복은 쾌락이나 의미 등 주관적인 느낌과 거리가 멀다고 주장한다. 행복을 얻는 비결은 '자신의 진실된 모습을' 파악하는 것이라는 얘기다. 저자의 상대주의가 불교에 기반을 두고 있음이 잘 드러낸 부분이다. 다만, 이 책에서 가장 '튀는' 부분임은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마지막 20여 페이지가 바로 이 책에서 가장 유명한 부분일 '호모 사피엔스의 종말'로. 인간이 진화와 자연선택의 굴레에서 벗어나 생명공학(유전자 조작), 사이보그 공학(유기물과 무기물의 결합), 그리고 비유기물공학(강한 인공지능) 등 '지적 설계'를 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어쩌면 호모사피엔스가 완전히 다른 존재로 (인간 자신에 의해서) 대체될 수도 있는데, 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이 되고 싶은가'하는 질문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우리 마음대로 새로운 종을 만들 수 있을 테니까. 가장 유명한 부분이지만, 가장 짧고 공허한 부분이기도 하다.


잘 나가다가 왜 저자는 이런 '인공지능/특이점/기술과 미래' 등등의 방향으로 빠졌을까? 물론 그래서 책은 광고가 잘 되었다. 하지만, 이 쪽의 내용을 기대했던 사람들은 실망도 많이 했을 것이다. 나는 한 번 이런 가설을 세워 본다. 저자가(아니면, 나 자신이) 진짜 하고 싶었던 질문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잘 나가는 종교-이데올로기인 자유주의적 인본주의(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과연 지속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아닐까? 현재 많은 사람들이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인류 문명의 가장 발전된 형태라고 생각하지만, '과학'을 대입해 보면 둘 사이의 모순이 드러나게 된다. 현재 자본주의가 당면한 저성장이라는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과학의 발전, 특히 위에서 본 생명공학 내지 '지적 설계'의 발전이 필요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지적 설계'의 발전은 인간의 존엄성을 굳게 믿는 자유민주주의와 갈등을 겪게 된다. 우리의 미래는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과학기술과 '지적 설계'의 발전으로 경제 성장이 다시 촉진되어 자본주의는 발전하지만, 그 과정에서 자유민주주의 대신 다른 이데올로기 (진화론적 인본주의의 부활? 혹은 기독교를 대신한 불교 사상의 전세계적인 전파?)가 등장하게 될까? 이러한 상황에서 요즘 뜨거운 주제인 '기초소득'은 자칫 '퇴화된(이류) 인간의 생존을 보장하기 위한 수단' 내지 '자본주의의 제2규범인 소비지상주의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 될 수도 있을 듯하다.


아니면, 과학기술의 발전이 벽에 부딛쳐 경제 성장이 사라지고, 결국 자본주의가 소멸되어 다른 경제체제로 이행할 가능성은 과연 없을까? 사회주의는 실패했다지만, 인간은 다른 경제 체제를 '상상'해 낼 수도 있을 것이다. 물질적 성장은 멎을지 몰라도, 인간의 존엄성, 자유와 평등은 계속 보존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일신교(기독교), 자유민주주의, 자본주의, 민족주의 등을 굳게 믿는 사람들에게는 불편할 수도 있을 책이다. 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나도 놀라지 않는다'를 생활 신조로 가지고 있는 '상대주의자'인 나는 이 책이 꽤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나는 내일 또 성당에 갈 것이다. 어차피 '인간에게는 모순을 믿는 놀라운 능력이 있으니까' 말이다. 종교(이데올로기)를 믿는 사람들이 특히 많은 것으로 생각되는 한국에서 이 책이 많이 팔리는 것이 놀랍기도 하다. 혜민 스님의 베스트셀러들보다 훨씬 불교적인 책이고, 역사-문화상대주의를 전파시켜 결국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데도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출처: 오석태님 블로그 및 페이스북 링크

http://blog.naver.com/neolone/220721827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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