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전을 피해 시리아를 빠져나와 한국 제주도에 머물고 있는 시리아인 아일란 이스마일이 10일 오후 자신이 일하는 식당 테이블의 그릇을 정리하고 있다. 아일란의 집은 정부군 전투기의 폭격으로 무너졌고, 그는 징병과 죽음의 위협을 피해 터키로, 한국으로 달아나야 했다.   제주/박기용 기자
내전을 피해 시리아를 빠져나와 한국 제주도에 머물고 있는 시리아인 아일란 이스마일이 10일 오후 자신이 일하는 식당 테이블의 그릇을 정리하고 있다. 아일란의 집은 정부군 전투기의 폭격으로 무너졌고, 그는 징병과 죽음의 위협을 피해 터키로, 한국으로 달아나야 했다. 제주/박기용 기자
내전이 발발하면서 국외로 떠난 시리아 난민들은 400만명이 넘습니다. 올해 유난한 난민들의 대이동은 로마제국 몰락의 계기가 된 게르만족의 이동에 비견됩니다. 한데 난민 문제는 유럽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까지 한국 정부를 상대로 난민 지위를 신청한 이들은 1만1100여명이고, 이 중 시리아인들도 700명이 넘습니다. 내전으로 나고 자란 나라를 떠나온 이들은 한국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요. 우린 그들을 충분히 배려하고 있을까요? 약 3년 전 한국 제주도에 흘러들어와 정착한 한 시리아인을 만나 얘기를 들어봤습니다.

아일란 이스마일(가명·22)은 제주도에 사는 유일한 시리아인이다. 아일란은 2012년 12월 한국에 오기 전까지 중국, 일본과 한국을 구분하지 못했다. 마치 우리가 시리아와 요르단, 레바논이 국경을 맞댄 나라란 사실에 익숙하지 않듯.

10일 오후 찾아간 제주시청 인근 한 식당에서 만난 아일란은 잘 웃는, 낙천적 성격의 평범한 20대 초반의 젊은이였다. 한국말도 유창했다. “잘생겼다”고 했더니 쑥스럽게 웃었고, 수염이 덥수룩한 자신의 턱을 만지며 “면도하고 올 테니 사진을 다시 찍자”고도 했다. 얼핏 보아선, 송두리째 혼란의 구렁텅이에 빠진 나라의 국민이라 여겨지지 않을 만큼 천진한 느낌이었다. 식당 일이 끝난 아일란을 데리고 인근 카페로 가 이야기를 나눴다.

알려진 것처럼 시리아는 올해 전세계를 강타한 난민 이슈의 한가운데에 있다. 2011년 3월 발발한 내전으로 지금까지 22만명이 숨졌고, 집을 떠나 안전한 곳을 찾아 헤매는 시리아인은 내전 직전 인구 2300만명의 절반이 넘는 1160여만명(유엔난민기구)에 이른다. 이 난민들 중 400만명 이상이 국경을 넘어 터키와 레바논, 요르단 등 이웃 나라와 세계 각국으로 떠났다. 이 중 한국에 온 이가 713명(1994년 이후 난민신청자·올해 5월 말 기준)이다. 아일란도 이들 중 하나다.

아일란은 우리로 치면 부산에 해당하는 시리아 제2의 도시 알레포 출신이다. 시리아 북부에 위치한 알레포는 “시리아에서 가장 위험한 도시”다. 시리아 북부를 장악한 반군 세력과 정부군이 번갈아 도시를 점령하며 교전을 벌였다. 아일란의 집도 정부군 전투기의 폭격으로 무너졌다. 다행히 가족들은 집 밖에 있어 화를 면했지만, 같은 건물의 누가 그때 숨졌는지는 모른다. 내전이 격화되자 대학생들도 군대에 가야 했다. 대학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하며 컴퓨터 수리 일을 하던 아일란은 징병과 죽음의 위협을 피해 가족을 남겨 둔 채 터키로 달아났다. 아일란은 “군대에 안 가면 죽고, 가면 누군가를 죽여야 했다. 사람들은 그냥 죽었다. 집이 무너져 죽었고 거리에서 총을 맞았다. 집에서 나가면 돌아오지 못했다”고 했다.

아일란은 터키 앙카라에서 두달간 머물다 한국 비자를 받았다. 아일란의 아버지가 한국에서 사업을 하던 시리아인 지인을 통해 아일란을 초청해줬다. 두살 터울인 남동생도 같은 방법으로 반년 먼저 한국에 와 있었다. 인천으로 입국한 아일란은 곧바로 동생이 잠시 머물던 제주도로 왔고, 동생은 이후 서울로 갔지만 아일란은 그대로 남았다. 아일란이 떠난 뒤 아버지와 어머니, 또 다른 두 동생도 시리아를 벗어나 터키로 거처를 옮겼다. 내전으로, 아일란의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다.

알아서 버텨보라”

아일란이 자신의 외국인등록증을 꺼내 보였다. 체류자격이 ‘기타(G-1)’로 표기돼 있었다. G-1 비자는 흔히 ‘인도적 체류’로 불리는데, 난민 인정 요건에 해당하지는 않지만 정치적 이유나 재난 등으로 자신의 나라로 돌아갈 수 없는 이들의 출국을 유예해주는 제도다. 1년마다 갱신하며, 의료보험 등 기본적 사회보장 혜택이 없고 단순노무직 등에 한해 취업할 수 있지만 매번 취업허가를 받아야 한다. 내전 등의 상황이 끝나면 자신의 나라로 돌려보낸다는 게 이 제도의 취지다. 하지만 시리아처럼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혼란의 소용돌이에 있는 나라의 사람들에겐 “알아서 버텨보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아일란의 경우가 그랬다. 아일란은 한국에 온 직후 제주도의 식재료 공장과 주택 건설 현장 등에서 일했다. 한국말을 전혀 못하던 때다. 사장은 임금을 적게 줬다. 다른 이들은 일당으로 10만원을 받았는데 아일란에겐 별다른 이유 없이 4만원만 줬다. 식사도 형편없었다. 말이 통하는 사람이 없어 혼자 속앓이만 했다. 그러다 건강이 나빠졌다. 어느 날 화장실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아일란은 “배에 피가 차서 화장실에서 한가득 쏟아냈다. 죽을 것 같았다”고 했다. 병원에 입원해보니 완치가 되지 않는 ‘크론병’이었다. 한달간 입원했다 퇴원했지만 의료보험 혜택을 받지 못해 병원비가 수백만원이 나왔다. 퇴원 뒤 다시 피를 흘렸고 치료와 약값으로 병원비는 점점 불었다. 아일란의 딱한 사연을 알게 된 난민인권센터와 외국인 의료공제회 등이 도움을 줬지만 아일란은 한동안 번 돈을 모두 병원에 갖다줘야 했다.

아일란은 최근 펜션 청소와 식당 일 등을 하며 생계를 이어간다. 한 달에 140만원가량을 벌고 40만원을 집 월세로 낸다. 남은 돈은 계속 먹어야 하는 약값과 식비 등으로 쓰고 터키의 가족들에게 일부 보낸다. 3년 동안 저축을 전혀 하지 못한 채, 한 달 동안 벌어 한 달 동안 쓰는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한국 생활이 녹록지 않지만 아일란은 시리아로 돌아갈 생각을 버린 지 오래다. 며칠 전 아일란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내가 이곳 한국에 없었다면, 난 아마도 수영을 해서라도 유럽으로 건너가려 했을 것”이라고 썼다. “내전이 끝나면 고향인 시리아에 돌아가고 싶지 않겠나”라고 묻자 아일란은 “시리아엔 이제 남은 게 없다. 집도 없고 일도 없고 사람들도 없다. 아무것도 없다. 이제 내겐 한국이 더 고향 같고 편하다”라고 했다. 한국에 온 첫날, 무슨 맛인지도 모르고 먹었던 김치찌개가 이제 아일란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됐다.

아일란 같은 난민은 자신의 국가로부터 인권을 보호받기 힘든 이들이다. 한국전쟁 당시 우리가 그랬고, 천안문 사태 때 중국인들이, 요즈음의 탈북민들이 그렇다. 인도적 차원에서 다른 국가에서라도 이들의 인권을 보호해야 한다고 규정한 것이 난민협약이다. 난민으로 인정한다는 말은 곧, 자국민과 거의 동등한 대우를 하면서 원하는 만큼 그 나라 땅에서 살 수 있게 해준다는 뜻이다. 한국이 이 ‘난민의 지위에 관한 협약’을 비준한 것은 1992년 12월, 남과 북이 유엔에 동시가입한 바로 이듬해였다. 문명국으로서, 필요한 의무를 수행하겠다는 의미였다. 1994년 출입국관리법을 개정해 난민 신청을 받기 시작했고 2001년 2월 에티오피아 국적자의 난민 지위를 처음으로 인정했다. 2013년엔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난민법’도 제정했다.

하지만 실제 우리 정부가 난민 지위(F-2)를 인정하는 비율은 매우 적다. 난민법을 형식적으로 갖춰놓았다는 의심이 들 정도다. 김성인 난민인권센터 사무국장은 7일 “난민법 제정으로 필요한 틀은 만들었지만 정부 자세에 변화가 없다. 난민 인권 문제와 관련해 한국 정부가 무언가 하고 있다는 상징적 의미밖에 없는 수준”이라고 했다.

시리아 떠나와 한국 제주도에 정착
중국·일본과 한국 헛갈렸었다
난민 인정 안돼 ‘인도적 체류자’로
한국생활 초기 사장은 임금 떼먹어
식사도 형편없어 건강 나빠져

어느날 갑자기 피 토하며 쓰러졌다
난치병 걸렸지만 의료보험도 없어
한달 벌어 한달 쓰는 생활 이어가
“난민 인정되면 한국에 귀화할 것
가족들 데려와 살면 얼마나 좋을까”

수사 같은 난민 조사

난민인권센터가 정보공개 청구를 통해 법무부에서 받은 자료를 보면, 지난 5월까지 난민 신청자는 1만1172명이지만 난민으로 인정받은 이는 496명에 불과하다. 인정률이 4%대다. 유엔난민기구 통계상 세계 평균인 38%에 턱없이 모자란다. 여기에 가족 결합 같은, 난민 인정자의 배우자나 미성년 자녀를 난민으로 인정하는 ‘당연 인정’ 사례를 제외하면 인정률은 더 떨어진다. 올해 1월부터 5월까지 가족 결합을 제외하면 난민 지위 심사를 통해 결과를 통지받은 이들은 1265명인데, 이 중 난민으로 인정받은 이는 두 명뿐이다. 인정률 0.16%의 ‘바늘구멍’이다. 한국 정부가 난민으로 인정해주는 일은 이들에겐 꿈같은 일이다.

문제는 낮은 인정률만이 아니다. 난민 지위를 신청해 첫 결과를 받기까지 통상 1년가량의 시간이 걸린다. 불인정되면 다시 이의신청을 하고, 소송 등의 각종 구제수단 등을 거치면 3~4년 이상 걸린다. 그사이 난민 지위 신청자(G-1-5)들의 거주나 생활은, 6개월의 임시체류 허가 기간을 제외하곤 법적으로 전혀 보장돼 있지 않다. 인천 영종도에 출입국외국인지원센터가 있지만 50명 정도의 난민 신청자가 생활하고 있을 뿐이다. 이들에게 지급되는 월 40만원 수준의 정부 지원금도 6개월이 지나면 끊긴다. 자연스레 불법체류자가 양산된다.

난민 지위 심사 과정도 이들에게 호의적이지 않다. 난민 지위 인정 등을 돕는 공익법센터 ‘어필’의 이일 변호사는 9일 “출입국사무소 공무원들은 난민 신청자들을 일종의 피의자로 본다. 조사를 수사처럼 한다. 제대로 된 진술이 어렵고 기억에만 의존해야 하는 난민의 취약성을 고려하지 않는다”고 했다. 난민의 인권을 보호한다기보단 ‘난민인 척하는 이들’을 걸러내려 한다는 것이다. 아일란도 입국 3개월 뒤 제주도에서 난민 지위를 신청했고 6개월 뒤 심사를 받았다. 그는 “출입국사무소 사람들은 시리아 사람을 무서워하는 것 같았다. 위험인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더라. 그래서 계속 (사소한 것까지) 다 물어봤다. 그래놓고는 (난민 지위를) 안 줬다”고 했다.

특히 아일란을 비롯한 시리아인들에 대해 지난해부터 기계적으로 부여되는 ‘인도적 체류’ 지위도 문제로 떠오른다. 지난해 9월 박근혜 대통령은 유엔 총회 연설에서 “이라크와 시리아에서 새로운 형태의 인도적 참사를 목격하고 있고, 한국은 이러한 인도적 참사 예방을 위한 유엔의 노력에 동참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통령의 연설이 있은 뒤 법무부는 한국에 난민 지위 인정을 신청한 시리아인들에 대해 지난해 5월부터 인도적 체류 지위를 부여해왔다는 보도자료를 냈다. 법무부는 실제 지난해 시리아인 502명에 대해 인도적 체류 지위를 인정했다. 한해 전까지 전체 난민 지위 신청자 중 인도적 체류 지위를 받은 이들이 다 합쳐도 177명뿐이었는데, 지난해 단번에 늘어난 것이다. 특히 내전 상황인 시리아인들은 거의 대부분 기계적으로 인도적 체류 지위를 받고 있다. 오히려 지금까지 난민 지위를 인정받은 시리아인은 세 명에 불과하다.

하지만 인도적 체류자들은 아일란처럼 의료보험 등 기본적 사회보장 혜택을 받을 수 없다. 교육도 받을 수 없고 취업도 제한적이어서 한국에서 제대로 살아가기 어렵다. 아일란처럼 몸이 아파도 돈이 없어 병원에 가지 못한다. 게다가 심사를 통해 난민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람조차 보충적 지위에 불과한 인도적 체류자로 분류돼 기회를 박탈당하는 문제도 있다. 이 때문에 난민인권센터 등 여러 단체들도 이를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로 본다. 국가인권위원회도 지난해 인도적 체류자들에게 건강보험 가입 자격을 부여할 것을 보건복지부에 권고했다. 김성인 사무국장은 “도와줄 거면 제대로 도와달라는 것이다. 어차피 이들은 여생을 한국에서 보내야 할 사람들이다. 고향을 떠나 가족과 떨어진 사람들에겐 굉장히 다양한 문제가 발생한다. 이들의 지위를 더 현실화시켜야 한다”고 했다.

대단한 얘기가 아니다

인도적 체류자의 지위를 개선하는 등 난민법 개정안이 국회에 계류 중이지만, 처리 전망은 그리 밝지 않다. 개정안은 난민 지위 인정 심사 때 공정성이 보장되도록 하고, 난민의 미성년자 자녀에게 영유아 보육 등을 지원하는 내용들을 담았다. 자녀뿐 아니라 배우자에게도 의료비나 생계비를 지원하고 인도적 체류자에 대한 지원 방안을 담은 개정안도 있지만, 그간 난민과 관련한 사회적 논의가 전무했던데다 예산이 드는 문제여서 법안 통과를 낙관하는 이는 드물다.

아일란은 한국에 오기 전 자신이 한국에서 살게 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실제 난민 지위를 신청한 시리아인들 대부분이 그렇다. 사업 등의 이유로 내전 발발 전부터 이미 한국에 와 있다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이들이 다수다. 최근 몇년 사이 왔어도 한국을 목표로 했던 이는 드물다. 올해 4월 시리아인 중에선 한국 정부에 의해 사상 세번째로 난민으로 인정받은 이도 그랬다. 그는 시리아에서 경찰로 일하며 반군을 도운 혐의로 구금됐다 풀려났지만, 또다시 언제 잡혀갈지 알 수 없었다. 결국 독일로 가려고 브로커의 도움을 받았다. 그는 터키에서 출발해 제3국과 인천을 거치는 길을 안내받았다. 하지만 예상치 못하게 인천 출국 과정에서 위조 여권이 들통났다. 다시 출발지인 터키로 송환됐지만 터키가 다시 그를 인천으로 보냈다. 오도 가도 못하게 된 그는 인천공항에서 한국 정부에 난민 지위를 신청했다. 첫 신청 때 기각됐다가 이의신청 과정에서 난민 지위를 받을 수 있었다. 김연주 난민인권센터 변호사는 “한국이 안전한 난민협약국이고 인권국가라며 알고 찾아오는 이는 드물다. 당면한 위협을 피할 곳을 찾다가 그 과정에서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서, 본인이 개입하지 못한 상태에서 한국으로 온 경우가 많다”고 했다.

무엇보다 한국 내 난민은 아직 그리 많지 않다. 관련 예산도 턱없이 적다. 8조원을 배정한 독일 등 유럽 국가에 견주면 비교가 안 될 만큼 적다. 이일 변호사는 “난민 신청자는 1년에 3000명 정도이고, 정부 관련 예산은 17억원에 불과하다. 우리는 국가 정책 차원에서 난민 수용의 문제를 얘기할, 그런 단계조차도 안 된다. 대단한 얘길 하는 게 아니다. 소수지만 찾아온 사람들을 왜 돌려보내야 하는가. 국가의 경계 사이에서 어디에도 가지 못하는 사람들을 인간으로서 존엄을 잃지 않고 살 수 있게 포용하는 문제다”라고 했다.

아일란의 부모와 남은 두 동생은 현재 터키에 머물고 있다. 아일란의 아버지는 터키의 플라스틱 공장에서 하루 14시간씩 일하지만 월급은 우리 돈으로 50만원이 채 되지 않는다. 인접국인 터키로 시리아인이 너무 많이 흘러든 탓에, 터키에서 시리아인들의 삶은 팍팍하기만 하다. 아일란의 페이스북은 일하는 식당에서 키우는 고양이 사진과 함께, 조국 시리아 사람들의 뉴스로 도배돼 있다. 아일란은 “난민으로 인정받으면 한국인으로 귀화하고 싶고, 부자가 되고 싶다. 돈을 벌어 터키의 가족들을 데려와 같이 살고 싶다. 그렇게 되면 정말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앞날을 그려보는 그의 표정이 여전히 천진했다.



출처: 제주/박기용 기자 xeno@hani.co.kr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arabafrica/70857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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