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 제러미 코빈 열풍이 뜨겁다. ‘듣보잡’ 수준이었던 그가 노동당 대표로 선출되리라고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20∼30대 지지자들이 열렬히 그를 도왔다. 코빈 열풍의 이면에는 영국의 불평등이 자리 잡고 있다.




영국은 지금 ‘코빈앓이’ 중이다. 노동당의 제러미 코빈 신임 대표에 관한 기사가 끝도 없이 쏟아지고 그 밑에는 어김없이 수백, 수천 개의 댓글이 달린다. 그리고 수천, 수만의 누리꾼이 해당 기사를 공유한다. 처음엔 ‘대체 이게 뭐지?’ 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다 말겠지’ 하더니 ‘어! 이것 봐라’로 바뀌었고, 이젠 ‘대체 어떤 세상일까?’ 상상하기 시작했다. 2020년 선거에서 노동당이 승리했을 때를 가정해 ‘그의 첫 100일’을 상상해본 기사까지 등장했다. 이 정도면 열풍의 수준을 넘어 광풍이라 할 만하다. 모두가 알고 있듯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듣보잡’ 수준이던 그가 출마 선언과 동시에 다크호스로 부각되자 기다렸다는 듯 안티들이 출몰했다. 1994년 토니 블레어가 그 유명한 당헌 4조(Clause 4), 즉 모든 생산수단은 국유화해야 한다는 조항을 삭제한 뒤 주류 정치에서 거의 자취를 감추었던 사회주의자가 제1야당의 유력한 당 대표로 부각됐으니 화들짝 놀란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특히 일간지 <텔레그래프>를 비롯한 보수지의 집요한 공격은 그 어느 때보다 매서웠다. 한국 정치의 전매특허라고 할 수 있는 색깔론까지 등장했으니 그 상대가 북한이 아닌 무슬림이란 차이뿐 공격 방식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9·11과 아프간 침공도 모두 비극이었다. 이라크 전쟁도 비극이었다. 수십만의 사람들이 죽었는데 어찌 비극이라 하지 않겠느냐”라는 말에 이어 “오사마 빈라덴의 죽음 역시 비극이었으니 그는 암살이 아니라 법정에 세웠어야 마땅했다”라고 한 코빈의  발언은 “오사마 빈라덴의 죽음은 비극”이란 몇 글자로 압축됐다. 그가 헤즈볼라와 하마스를 ‘친구들’(friends)로 표현한 인터뷰도 전후 맥락과 상관없이 편집돼 표적이 되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AP Photo</font></div>9월12일 제러미 코빈 의원이 영국 노동당 대표 선거에서 승리한 후 지지자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AP Photo
9월12일 제러미 코빈 의원이 영국 노동당 대표 선거에서 승리한 후 지지자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적’은 내부에도 넘쳤다. 토니 블레어는 “설령 나를 증오한다 할지라도 제발 노동당을 벼랑 끝으로 몰고 가지는 말아달라”고 했고 그의 오른팔 알래스타 캠벨은 “코빈만 아니라면 아무라도 좋다. 그가 대표가 되는 순간 노동당은 끝장날 것이다”라고 공격했다. 고든 브라운도 예외는 아니었다. 코빈이 대표가 되면 노동당은 투쟁 정당으로 전락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노동당을 지지한 일간지 <가디언>도 합세했다. 코빈을 구닥다리 좌파(old left)로 규정하고 그가 선두에 선 경선을 가리켜 “디지털 시대의 아날로그 경쟁”이라며 비아냥거렸다.

하지만 그는 이겼다. 이겨도 아주 크게 이겼다. 그가 얻은 득표율은 1994년 토니 블레어가 당 대표에 선출되며 얻은 57%보다 2.5%포인트 더 높았다. 다들 낡은 좌파라고 손가락질했지만 캠페인 내내 그와 함께한 자원봉사자와 지지자 대부분은 20∼30대였다. 그건 ‘뉴레이버’로부터의 엑소더스였으며 ‘옥스브리지’(옥스포드와 케임브리지 대학 출신) 엘리트 정치의 패배였다. 혹자는 이제야 비로소 다른 당이 보이기 시작한다고 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구름 위에 둥둥 떠 있던 노동당이 드디어 땅으로 내려왔다고 했다.

  

  
 

정치권이 외면했던 사안을 공약으로 채택

하지만 그의 출현과 승리는 이미 예견된 것이었으니, 그가 메시아로 등장한 게 아니라 세상이 그를 부른 셈이었다. 조사기관 유고브에 따르면 영국 시민의 60%가 철도의 재국유화에 찬성하는 반면 반대는 겨우 20%이고, 심지어 보수당 지지자들의 찬반 의견도 42대42로 갈렸다(왼쪽 <표> 참조). 연간 15만 파운드(약 2억8000만원) 이상 소득자들에게 50% 세금을 부과하는 ‘50p 택스(tax)’의 부활을 넘어 연소득 100만 파운드(약 18억원) 이상에게는 75%를 세금으로 거두자는 의견에 자그마치 영국 국민 56%가 찬성했다. 유권자 64%가 핵무기 추방에 찬성하고 59%가 집세 인상 상한선을 정해야 한다고 했으며, 대학 등록금을 대폭 삭감해야 한다는 의견도 49%에 이르렀다. 이처럼 국민 열망은 높으나 정치권에서는 아무도 건드리지 않고 있던 예민한 사안들을 코빈은 주저 없이 공약으로 채택했다. 철도를 비롯한 주요 기간산업의 재국유화를 공약했으며, 코빈과 그의 오른팔 존 맥도넬(예비 내각의 재무장관)은 고소득자에 대한 50p 세금을 넘어 ‘60p 택스’를 주장했다.

서슬 퍼런 색깔론의 포화 속에서도 이라크를 침공한 것에 대해 사과하겠다고 한 코빈의 말에 동의한다는 응답자(43%)가 반대한다는 응답자(37%)보다 많았으니 그는 절대 과격했던 게 아니다. 그런 사실은 총선 직후 노동당이 자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보수당(23%)이 노동당(19%)보다 더 급진적(radical)이라고 답한 사람들이 많았다는 사실로도 증명됐다. 정치인들이나 미디어의 해석과 달리 그동안의 노동당은 지나치게 타협적이었거나 지나치게 높은 데 있었으며 지나치게 오른쪽에 서 있었다는 얘기다.

코빈만은 절대 안 된다고 말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그가 대표직은 유지하되 총리는 절대 못 될 것이라 단언하고 있다. 노동당의 집권은 물 건너갔다는 것이다. 하지만 1945년 총선을 복기해보면 사정이 좀 달라진다. 당시 아틀리의 노동당은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끌고 기세등등하던 처칠의 보수당에 맞서 “주거 불안과 실업, 빈곤과 건강 문제와의 전면전”을 선포해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압도적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고는 세계 최초의 무상의료를 시작으로 복지국가 건설에 매진할 수 있었으니 주요 이슈에 관한 한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고, 난공불락으로 여겨지는 보수당의 기득권 또한 마찬가지다. 문제는 당시 유권자들과 지금 유권자의 생각인데, 그건 위에서 언급한 여론조사 수치를 통해 일정 부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당 안팎의 코빈 흔들기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을 전망이다. 당장 성차별 논란이 불거졌다. 예비 내각에 여성을 더 많이 기용하겠다던 코빈이 재무장관을 포함한 이른바 ‘빅4’를 모두 남성으로 채운 걸 두고 보수지와 당내 일부 세력이 트집을 잡고 나선 것이다. 이에 대해 코빈은 자신이 생각하는 핵심 요직은 건강과 교육, 일자리 같은 공공서비스 부문이며 빅4가 결코 핵심 요직이 아니라는 논리로 맞서고 있다. 그는 사상 최초로 예비 내각 31명 가운데 16명을 여성으로 채웠다. 집권 여부와 관계없이 “오랜만에 가슴이 뛴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라는 댓글이 넘쳐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남의 나라 정당의 전당대회를 챙겨보며 만세까지 불렀으니 평소 ‘빠’와 ‘까’에 관한 한 무관용으로 일관했던 자존심에 살짝 금이 가긴 했지만, 돌이켜보면 사람들이 코빈에게 푹 빠진 게 아니라 그가 유권자의 기대에 제대로 부응한 결과였으니 이 기회에 한국 야당에게도 진지하게 묻자. 영국에 명함조차 내밀 수 없을 정도의 불평등과 최악의 실업률 그리고 최악의 노인 빈곤을 이대로 두고 언제까지 중도 타령이나 할 건가? ‘심쿵’에 목마른 가슴들이 언제까지 먼 나라 쳐다보며 부러움만 남발하게 할 건가? 쿼바디스 한국 야당?



출처: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24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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