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리는 카드가 살아남는 법


나는 전자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졸업논문 자체는 물리에 관한 내용이 더 많다. 하지만 내가 학부 때 물리전자 관련 들었던 수업은 2개밖에 없었다. 돌이켜보니 박사학위 동안의 험난한 여정은 예정된 운명이었다. 나는 우리 지도교수님의 1기 학생이었다. 우리 지도교수님께서는 스핀트로닉스의 세계 최고 대가인 스튜어트 파킨 박사 밑에서 학위를 하셨고, 네이처에도 논문을 발표하신 스핀트로닉스 필드의 신성 같은 교수님이었다. 젊고 패기 넘치는 교수님은 아이템을 5개 준비하셔서 자신의 경력에서 최초의 연구원들인 5명의 학생과 포닥에게 연구를 분배하셨다. 아이템 중 4개는 교수님께서 잘 아시는 스핀트로닉스 분야였고, 나머지 하나는 그래핀이라는 교수님이 한 번도 연구해보지 않은 물질에 관한 주제였다. 나는 그래핀 관련 아이템에 배정받았다.

그렇다. 나는 사실 버리는 카드였다.

물리 배경이 전혀 없었던 나는 사실 스핀트로닉스 관련 실험을 당장 수행할 수가 없었다. 실력이 부족한 것이 내 탓이니 결정이 아쉽지만 담담히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교수님은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기 위해 나를 특공 용사(?)로 투입하였다. 나는 주변에 아무도 그래핀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물리과로 실험 정보 동냥을 다녔다. 지도교수님이 물리과의 한 교수를 연락해서 자신의 학생에게 실험 노하우를 전수해달라고 부탁했지만, 내가 그 교수의 부지도학생으로 배정이 불발되자(나의 연구가 본인의 실적이 아님을 깨닫자) 그 교수는 자신의 학생들에게 절대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다. 나는 그래도 실험을 해야 했다. 그래서 그 연구실에서 제일 만만한(?) 학부 연구생들을 살살 꼬셔서(?) 아주 얕은 수준의 노하우를 야금야금 배웠다. 그리고 혼자서 실험을 감행하기 시작했다. 실패의 연속이었다. 사실 실패인지 성공인지 알 방법도 잘 없었다. 계측을 하면서 신호가 측정되면 나도 지도교수도 그게 맞는 신호인지 아닌지 잘 알지도 못 했다.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났을까? 나는 새벽 3시에 우연치 않게 남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측정하는 기본 신호를 우연하게 측정했다. 얻어걸린 것이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올바른 실험을 시작하기 시작했다.

그럼 이제 연구가 술술 풀렸을까? 아니다. 얻어걸린 신호를 다시 제대로 구현하기까지는 몇 달이 또 걸렸다. 새로운 분야 개척도 중요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내 졸업이 훨씬 더 중요했다. 이런 식으로 연구가 진행되면 약 20년 정도 연구해야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실험은 많이 줄이고 논문이 될만한 주제를 찾으러 여기저기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우연치 않게 그래핀 표면 특성에 관한 컨퍼런스 발표를 보았다. 무식이 용감을 부른다고 물리도 모르는데 화학 분야에 대한 연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당연히 지도교수님도 전혀 모르는 분야였다. 아무튼 박사자격시험의 수월한 통과를 위해 좋은 논문 필요했던 나는 그 실험에 착수했다. 물론 전혀 모르는 분야기 때문에 시료도 관련 장비도 우리 연구실에 있지 않고 그러니 써 본적도 없는 것들이었다. 시료도 구걸하듯이 구하고 실험 장비도 빌붙듯이 사용했다. 그래서 결과를 조금 얻었고 잘 정리해서 교수님께 보여주니 교수님이 고개를 갸우뚱 하셨다. 그렇다. 전문가가 아니었던 우리는 그게 좋은지 나쁜지 판단도 잘 못했다. 그래서 학부 일학년 수준부터 다시 공부해서 추가 실험을 하면서 논문을 쓰기 시작했다.

여기서 버리는 카드의 아주 큰 장점을 언급하면 관심 밖에서 일하면 권한이 적게 주어지는 만큼 의무도 적게 주어진다. 그만큼 책임이 적기 때문에 더 자유롭다. 또, 사람들은 자신이 무관심한 일은 어떻게 잘 돌아가는지 모른다. 그래서, 내가 일을 하면 우리 교수님은 그게 얼마나 진행된 것인지 잘 알 수 없었다. 나는 그래서 자유롭게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이거저것 했다. 필요하면 도서관에서 살면서 연구실 출근도 안 하면서 몇 날 며칠 기초과목만 공부한 적도 있다. 그때 쌓인 스스로 공부하는 법들이 내 인생에 큰 내공이 되었다. 그렇게 연구는 계속 진행되었고 우리는 꾸역꾸역 진도를 나가 결국 논문을 완성했다. 이 논문 최고의 학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꽤 인정받는 (올림픽으로 따지만 동메달 수준) 저널에 결국 실렸고, 지금 현재 거의 200번 인용에 육박한 아주 좋은 페이퍼가 되었다.

버리는 카드는 이렇게 조커로 조금씩 변모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나는 가장 연구 내공이 낮았지만 가장 먼저 페이퍼를 게재하였고, 연구실의 두 번째 페이퍼도 내가 또 좋은 저널에 게재하게 되었다. 나는 그래서 박사논문을 거의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다 주도적으로 설계하였다. 교수님은 내가 데이터를 뽑으면 적극적으로 도와주시기만 하였다. 그렇게 나는 좋은 저널에 5개의 논문을 3년도 안되어 발표하는 괴물 같은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 그중에 하나는 마찰력 관련으로 실험으로 나와 지도교수님은 이 논문을 내기까지 마찰력에 단위도 정확히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 페이퍼도 바닥부터 공부해서 전문가들과 상의해 가면서 결국은 좋은 저널에 게재되었고 지금 약 50 번 정도 인용이 되는 아주 인정받는 논문이 되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버리는 카드의 이점인 자유로움을 극대화하여 우리는 결국 사고를 친다.

그래핀 분야가 잘 되니깐 포닥 한 명이 스핀트로닉스 분야에서 그래핀 분야로 넘어왔다. 사실 그 친구도 포닥 중에 버리는 카드가 된 것이다. 물리 지식이 부족했던 나는 버리는 카드인 칼론 박사가 너무나도 반가웠다. 우리는 그렇게 같이 실험을 했고 아주 흥미로운 물리 현상을 계측했다. 때마침 학교에서 그래핀 학회가 있었는데, 운명의 장난처럼 그 자리에는 그래핀으로 노벨상을 받은 안드레 가임 교수가 있었다. 우리 교수님은 우리가 측정한 데이터를 발표하였다. 교수님의 주 전문분야가 아니라서 그런지 교수님도 발표에 자신이 없었고, 포닥인 칼론 박사는 심지어 발표장에서 도망을 갔다. 발표가 끝나자 안드레 가임 교수가 딱 한마디를 했다. “그 현상은 너희 시료가 아주 더럽기 때문에 측정된 것이다. 터무니없다.” 반박 한 번 못하고 그렇게 발표가 끝났고 대가들 세계 벽의 높이를 실감했다. 그래도 주눅들지 않고 계속했다. 버리는 카드들이 잃을게 무엇이 있겠는가? 그렇게 2년 정도 실험을 더하고 꾸준히 동메달 급 저널에 계속 논문을 내면서 우리는 아주 근근이 살아남았다.

꾸준함은 특별함을 만든다.

우리에게도 기회가 왔다. 정말로 괜찮은 신호를 확실히 계측했다. 그래서 최고의 이론 물리학자인 안토니오 교수에게 가설을 바탕으로 시물레이션과 더 탄탄한 이론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안토니오는 우리에게 슈퍼헤비급 독설을 날렸던 안드레가임 교수를 소개해 주었다. 우리 교수님은 2년여 만에 다시 심사대 앞에 서서 또 발표를 하셨다. 이번에는 달랐다. 안드레 가임 교수는 상당히 흥미로운 반응을 보였고, 우리는 공동연구를 진행하게 되었다. 버리는 카드 두 명과 비전문 영역의 교수가 노벨상 수상자랑 일을 하게 된 것이다. 원래는 내가 맨처스터 대학의 전문 연구원으로 가서 연구를 진행했어야 됐지만 내가 취업을 결정해서 칼론 박사가 가서 추가 실험을 하였고 우리는 그 결과를 바탕으로 끝내 세계적인 권위지 네이처지의 자매지인 네이쳐 커뮤니케이션에 2015년 9월 21일 “Extremely Large Magnetoreistance in Few-layer Graphene/Boron-Nitride Heterostructure” 라는 논문을 노벨상 수상자와 함께 발표하게 되었다. 그리고 칼론 박사는 유럽에서 가장 권위 있는 프로그램인 마리퀴리 펀드를 받고 안드레 가임 교수 밑에서 연구를 더 하게 되었다.

동전에는 양면이 있다. 절대 한 면만 있는 동전은 없다.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좋은 면이 있으면 나쁜 면도 반대에 있고, 나쁜 면이 있으면 좋은 면도 반드시 존재하기 마련이다. 위기는 기회라는 말이 식상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축구에서도 역습은 상대방이 우리를 가열차게 공격할 때만 가능한 것이다. 야구에서도 상대방의 찬스를 막아내면 상대방의 사기는 떨어지고 초조함은 상승하면 우리 팀의 기회가 오는 것이다. 누구나 관심 안에 있고 싶어 한다. 하지만 관심의 파트너는 구속이다. 자유롭지 못 한 것이다. 버리는 카드가 되면 비참하기도 하겠지만 자유로움이라는 엄청난 포텐셜을 얻는다. 그 자유로움이야말로 가장 큰 기회이다. 그러니 자신 지금은 조금 관심 밖에 있다고 신세한탄에 자유로움을 낭비하지 마라. 그럼 더 이상 버려진 카드가 아니라 찢어진 카드가 될 것이다. 찢어진 카드는 아쉽게도 나중에 판에 다시 들어오지 못한다는 사실도 잊지 않았으면 한다. 이 글을 비로서 나의 무지함을 묵묵히 받아주셨던 존경하는 그리고 사랑하는 양현수 교수님께 머리숙여 감사드린다고 전한다. ( 이 문장 치는데 눈물이 나온다.)

http://www.nature.com/ncomms/2015/150921/ncomms9337/full/ncomms9337.html

* 이 글은 내가 좋아하는 노력과 지성의 아이콘 브루스가 힘든 시기를 잘 이겨내기를 바라면서 브루스에게 바친다~! 화이팅 브루스!

** 원래 네이쳐 페이퍼들은 공저자도 나름의 권위를 가지기 때문에 이놈저놈 숟가라을 얹는다. 그러나 여기는 나와 고삐 그리고 가임 교수의 포닥 라시드만이 실험을 진행했고 나머지는 나의 지도교수 우리 나노코어 센터장 벵키교수 이론을 만든 안토니오 교수, 그리고 가임 교수까지 한 명의 어중이 떠중이 없다.




출처: 신영준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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