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사전에 담긴 인문학의 정의는 이렇다. ‘인간에 관한 학문’. 그러니 문(文)·사(史)·철(哲)만 인문학이 아니다. 인문과학도, 자연과학도, 사회과학도 다 같은 인문학이다. 인간에게는 몸과 마음이 있다. 불교는 마음을 찾아가는 길이다. 그럼 불교를 ‘마음 인문학’이라 불러도 되지 않을까. 활자에 갇힌 학문이 아니라 생활 속에 살아서 꿈틀대는 숨 쉬는 인문학 말이다.

 지난달 말 서울 삼청동 국제갤러리에서 푸른 눈의 현각(51) 스님을 만났다. 한국 불교를 세계에 알린 숭산(1927~2004) 스님의 제자인 그는 1990년 미국에서 한국으로 왔다. 99년 출간한 『만행-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는 밀리언셀러가 됐다. 2008년 말 그는 훌쩍 한국을 떠났다. 독일 뮌헨을 거쳐 지금은 하이델베르크에서 참선을 가르치고 있다. 오랜만에 만난 현각 스님은 “불교는 종교가 아니다”고 선언했다.

현각 스님은 “독일과 한국은 문화가 다르다. 그래도 사람들이 던지는 물음은 똑같더라. 독일 사람들도 왜 태어났는지, 내가 누구인지, 왜 사는지에 대한 깊은 물음을 안고 있다”고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불교는 종교가 아니다. 그럼 뭔가.

 “불교는 테크놀로지(Technology·기술)다.”

 -무엇을 위한 테크놀로지인가.

 “마음을 찾기 위한 테크놀로지다.”

 -그럼 종교보다 과학의 범주인가.

 “그렇다. 불교는 과학이다. 우리가 불교에서 과학성을 잃을 때 늘 문제가 생긴다.”

 -어떤 문제가 생기나.

 “과학은 없고 신앙만 남게 된다. 옛날에는 평범한 사람들이 글을 배우기가 어려웠다. 한자로 된 경전을 소화하기도 힘들었다. 그래서 기복적 성격이 강했다. 이제는 다르다. 세대가 바뀌었다. 게다가 정보화 시대가 왔다.”

 현각 스님은 독일 이야기를 꺼냈다. 독일 사람, 유럽 사람은 이제 종교에 목말라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스도교든, 불교든 맹목적인 접근을 하면 코웃음을 친다. 냉철하게 돌아선다. 그들이 목말라하는 건 테크놀로지다. 자기 마음의 평화를 찾아가는 테크놀로지다. 나는 거기서 불교가 앞으로 가야 할 방향을 읽는다. 한국 불교는 과학성을 회복해야 한다. 과학의 법과 마음의 법이 얼마나 똑같은지 강조해야 한다.”

 -신앙이 없는 종교, 그래도 괜찮나.

 “신앙이 뭔가. 테크놀로지에 대한 믿음이 바로 신앙이다. 거기서 힘이 나온다. 그게 신앙의 힘이다.”

 미국 예일대에서 철학과 문학, 하버드대학원에서 비교종교학을 전공한 현각 스님은 “너는 누구냐?”라는 숭산 스님의 단도직입적인 물음에 충격을 받고 출가했다. 한국에서 사는 동안 그는 스타였다. 저서는 베스트셀러가 됐고, 온갖 방송과 강연에서 그를 불렀다. 독일로 떠나기 직전 서울에서 그를 만난 적이 있다. 그때 스님은 이렇게 털어놓았다. “한국에서 나는 연예인으로 살았다.” 진솔한 자기고백이자 수도자의 절규였다.

 -왜 독일로 떠났나.

 “한국에서 내가 사찰에 가면 사람들은 ‘와, 현각 스님이다!’고 소리쳤다. 법문을 하기도 전에, 메시지를 던지기도 전에 말이다. 사람들은 메시지(Message)보다 메신저(Messenger)를 더 중시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니더라. 내게는 굶주림이 필요했다.”

 -어떤 굶주림인가.

 “스티브 잡스는 ‘스테이 헝그리!(Stay hungry!)!’라고 했다. 배고프게 살라는 뜻이다. 내게는 그런 배고픔이 필요했다. 서산대사는 ‘춥고 배고플 때 도심(道心)이 생긴다’고 말했다. 출가할 때 내가 가졌던 굶주림, 그걸 다시 찾아야 했다.”

 처음에 숭산 스님은 외국인 제자인 그에게 “한국말을 배우지 말라”고 했다. “한국말을 모르니 사찰 생활이 여러모로 불편하다”고 하소연하자 스승은 “네가 한국말을 하면 사람들이 자꾸 찾아와 그냥 두지 않을 거다”고 답했다. 결과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었다.

 -독일의 생활은 어떤가.

 “독일에서 나는 외국인이다. 말도 잘 안 통한다. 비자도 신경 써야 한다. 낯설고 외로운 곳이다. 하루하루가 도전이다. 굶주림, 나는 그게 영적 외로움이라 본다.”

 -외로움이 목적은 아닐 텐데.

 “물론 아니다. 우리가 ‘스테이 헝그리’할 때 안에서 물음이 올라온다. ‘왜?’라는 물음표가 생긴다. 나는 누구인가, 왜 사는가, 어떻게 살 건가. 이런 물음이 자연스럽게 올라온다.”

 -그런 물음이 뭔가.

 “그게 바로 화두(話頭)다. ‘참나(True Self)’를 찾아가는 엔진이다. 선불교의 과학은 그런 물음을 통해 시동이 걸린다.”

 불교라는 ‘마음 인문학’에는 ‘이뭣고’ ‘마삼근(麻三斤)’ ‘무(無)’ 등 1700여 개의 공안(公案·깨달음을 담은 선문답 일화)이 있다. 그게 내 가슴에 간절한 물음으로 박히는 순간, 화두가 된다. 그건 세상 모든 인문학의 출발선이기도 하다.

 -당신의 화두는 뭔가.

 “‘왜 사는가?’다. 스승인 숭산 스님을 만나기 전부터 갖고 있던 물음이다. 한국 스님들은 내게 묻는다. 어떤 화두를 갖고 있느냐고. ‘왜 사는가?’라고 대답하면 ‘그것 말고. 1700 공안 중에 어떤 화두 들고 있느냐’고 되묻는다. 숭산 스님은 내게 따로 화두를 주지 않으셨다. 왜? 내게는 간절한 물음이 이미 있었으니까. ‘왜 사는가’.”

 -그게 왜 간절한가.

 “내 안에서 올라온 물음은 간절하다. 밖에서 가져와 억지로 심어놓은 물음이 아니니까. 종교가 있든 없든 사람들은 모두 내면에서 올라오는 자신만의 물음이 있다. 나에 대해, 삶에 대해, 인간에 대해, 자연과 우주에 대해. 그게 진짜 살아 있는 화두다. 그걸 따라가면 된다.”

 현각 스님의 어머니는 생화학자였다. 아들의 출가를 강하게 반대했다. 전통 가톨릭 집안에서 머리 깎고 승려가 되겠다니 이해하기 힘들었다. 한국에 온 현각 스님은 순천 송광사에서 수행하며 어머니께 편지를 썼다. 어떤 공부를 하고 있는지, 자신의 일상은 어떠한지 편지를 써서 보냈다. 그래도 답장이 없었다. 현각 스님은 편지를 계속 썼다.

 하루는 어머니의 답장이 도착했다. 이렇게 적혀 있었다. ‘세상의 어떤 학문이든 바닥까지 파다 보면 단 하나의 물음과 마주하게 된다. 그건 ‘나는 누구인가?’다. 네 편지를 읽다가 너의 수행과 나의 학문이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됐다. 내 아들이 낯설고 먼 나라까지 가서 그 물음의 답을 찾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기쁘다.’

 -어머니께선 어떻게 지내시나.

 “2년 반 전에 돌아가셨다. 미국의 병실에서 어머니의 마지막을 지켜봤다.”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 있나.

 “숨을 거두기 한 시간 전에 제게 말씀하셨다. ‘I always be with you(나는 항상 너와 함께 있겠다)’. 지금도 어머니는 나와 함께 계신다.”

 현각 스님은 말을 멈추었다. 인터뷰를 하던 카페를 둘러봤다. 침묵이 흘렀다. ‘삐유삐유’하는 새소리가 들렸다. “바로 이 소리다. 이게 어머니의 소리다.” 창밖으로 자동차가 지나갔다. 부르릉, 차 소리가 들렸다. “바로 저 소리다. 저게 어머니의 소리다.” 스님은 그렇게 답했다. 내 마음의 바탕, 어머니의 바탕, 새 소리와 차 소리의 바탕이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터뷰를 마쳤을 때 바깥은 어둑어둑했다. 경복궁 돌담 아래를 걸었다. 문득 스님의 어머니가 편지에 담았던 글이 떠올랐다. ‘모든 학문을 파다 보면 결국 하나의 물음과 마주치게 된다. 나는 누구인가.’ 그건 ‘인간에 관한 학문’을 하는 모든 사람이 끼워야 하는 첫 단추이자 마지막 단추가 아닐까. 해 저무는 봄날, 바람에 흩날리는 벚꽃잎이 물었다. 쉼 없이 흩날리며 물었다. 너는 누구인가, 왜 사는가.

현각 스님은

1964년 미국 출생. 예일대 졸업. 하버드 대학원에서 비교종교학을 전공했다. 숭산 스님의 강연에서 충격을 받고 출가했다. 석사 논문에서도 숭산 스님의 가르침을 다루었다. 출가 후에 송광사와 봉암사 등에서 참선 수행을 했다. 현재 독일 하이델베르크에서 참선을 지도하고 있다. 저서로 『만행』 『선의 나침반』 『오직 모를 뿐』 등이 있다.

[S BOX] ‘난 누구인가, 어디서 왔는가, 어디로 가는가’ 마음속 세 가지 책 읽어보라

인터뷰 말미에 현각 스님에게 물었다. “독자에게 추천할 만한 책 세 권을 꼽아달라.”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첫 번째 추천하는 책은 ‘나는 누구냐’라는 책이다.” 저자가 누구인지 출판사가 어디인지 물었다. 현각 스님은 빙긋이 웃더니 “마음속에 있는 책”이라고 답했다.

 마음속에 있는 책. 그건 아주 특별한 책이었다. “이 책은 표지도 없고 손으로 넘길 수 있는 종이도 없다.” 알고 보니 책장에서 꺼내는 책이 아니었다. 각자의 마음에서 꺼내는 물음이었다. 딱 세 개의 물음, 마음 인문학을 위해 현각 스님은 그걸 들춰보라고 했다.

 “두 번째 추천서는 ‘내가 태어났을 때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물음이다. 마지막 세 번째 추천서는 ‘내가 죽을 때 어디로 가는가’라는 물음이다. 나는 책 대신 이 세 가지 물음을 추천한다. 이들 물음이야말로 우리 마음속에 있는 진짜 책이니까.”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나는 어디로 가는가’. 우리 안에 이미 있는 책. 그러나 좀체 꺼내지 않던 책. 뽀얗게 앉은 먼지를 털고 현각 스님은 그 책을 읽어보라고 했다. 출가할 때 그가 품었다는 굶주림도 결국 그런 물음에 대한 굶주림이었다. 현각 스님은 그걸 따라가라고 했다.


출처: http://mnews.joins.com/news/article/Article.aspx?total_id=17615803

글=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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